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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명의 심장 영국

머지 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 탐방일시 :2018.08.17
  • 조회수 :2575
  • 좋아요 :0
  • 위치
    Albert Dock, Liverpool L3 4AQ 영국
  • 키워드
    군항, 왕립해군국립박물관, 메리로즈 박물관, 머지 사이드 해양 박물관

영국은 대항해시대에 선두주자로 나서며 강한 해군력으로 전 세계에 힘을 과시하며 해양을 제패하였으며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또한 식민지 건설을 통해 많은 국가들과 교역을 이루었고 무역량도 증가하면서 점차 ‘대영제국’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현재까지도 영국은 해양대국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영국이 대영제국, 해양강대국이 된 계기와 방법은 무엇일까. 해당 내용을 영국 포츠머스 현지 탐방을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해양문명의 심장 영국 대표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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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영국의 해양문명
1) 주요전쟁으로 패권을 장악한 영국왕립해군
2) 동인도회사와 삼각무역을 통한 해운
3) 포츠머스 조선소에서 발달 된 조선(造船) 기술력

2. 동아시아와 영국의 관계
1) ‘프로비던스 호’로 보는 영국해군의 모습과 조선(朝鮮)의 변화
2) 영국의 홍차문화 성립과 중국
3) 영국의 해양문명을 배워간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Ⅰ. 서론

‘영국(United Kingdom)’이라는 국가는 유럽 대륙 서북쪽에 있는 섬나라로, 그레이트브리튼섬의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스(Wales)와 아일랜드 섬 북쪽의 북아일랜드(벨파스트(Belfast))로 구성되어있으며,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될 때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음으로써 현재의 연합왕국이 되었다.
영국은 대항해시대에 선두주자로 나서며 강한 해군력으로 전 세계에 힘을 과시하며 해양을 제패하였으며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또한 식민지 건설을 통해 많은 국가들과 교역을 이루었고 무역량도 증가하면서 점차 ‘대영제국’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현재까지도 영국은 해양대국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영국이 대영제국, 해양강대국이 된 계기와 방법은 무엇일까. 해당 내용을 본 논문을 통해 밝혀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영국의 근대 해양사를 시작으로 ‘해군’, ‘해운’, ‘조선’을 주제로 대영제국의 번성과 성장 및 각 주제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대영제국 당시의 영국이 동아시아3국(일본, 중국, 조선)과 어떠한 교류가 이루어졌었는지, 이 3국은 영국의 어떤 문물을 수용하였는지, 수용 후에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에 대해 파악할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깊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프로비던스 호” 에 대해 알아보고 그 사건 이후의 대내외 변화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중국은 현재 영국에서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 잡은 “차”가 유입된 사유와 역사를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알아보며 동시에 차로 인해 발발한 아편전쟁과 전쟁이 중국과 영국에 끼친 각각의 변화를 알아볼 것이다. 끝으로 일본은 영국으로 보낸 사절단인 이와자카 사절단의 역사와 수행임무를 중심으로 “교류”에 관한 측면을 알아볼 것이다.
영국의 근대사 및 동아시아간의 관계로 근대 영국이 ‘대영제국’이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던 계기를 주제별로 나누어 파악하고 영향을 준 대내외적인 요소들을 짚으며 영국에서 어떤 장소가, 어느 부분에서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말할 것이며 이번 탐방을 통해 알게 된 부분을 되새기며 본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근대 영국의 해양문명

영국 역사는 자국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영국의 역사에는 수많은 나라가 등장하고 서로 많은 간섭과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간섭과 영향은 곧 산업혁명을 의미한다. 영국 근대사에서 산업혁명은 빠질 수 없는 용어이다. 본 논문에서 언급하는 ‘근대’ 라 함은 시기적으로 17~18세기와 그 이후를 의미하며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한다. 따라서 영국과 동아시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기 또한 동시대나 그 이후의 시기를 언급함을 시작에 앞서 언급하는 바이다. 인간이 직접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산업, 생활 등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영향은 전 세계에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다.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 또 다른 시장이 필요했고, 원료를 수입할 장소와 상품을 판매할 장소 또한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강제적인 통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전부터 바다에서 우세를 보이며 나아가던 영국은 산업혁명을 발판삼아 대영제국 성립에 한걸음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산업혁명만이 영국을 ‘대영제국’으로 이끌었다 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 그 요소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1) 주요전쟁으로 패권을 장악한 영국왕립해군

초기 해군은 상선과 군함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필요에 따라 상선을 무기로 무장하고 군인을 태워 해상에서 전쟁을 하였다. 당시 해군의 힘은 강력하지 않았으며 자국의 상선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다. 영국 정부는 무기로 무장한 상선을 이끄는 해적을 이용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영국 정부는 해적선이 자국(영국)의 상선을 침략하는 것을 불허하였으며 대신 외국 상선에 대한 침략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해적을 이용하여 많은 해양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다. 부정적인 “해적”의 이미지와는 달리 자국의 전투에 기여를 하였기에 영국은 해적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해적을 계속 유지하기에는 통제하기가 어려웠으며 유지비용 또한 상당하였기에 점차 해적에 대한 제제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해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군이 영국 최초의 공식적인 국군이 된 것은 1707년이었다.
“Acts of Union 1707" 이후 잉글랜드 해군과 스코틀랜드의 해군이 합병을 시도하여 왕립해군이 영국으로 들어온다. 이후, 무역, 지본, 산업기술이 변화하고 진화하게 되었으며 왕립해군 또한 발전하게 된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2-3)때 네덜란드 해군과 함께 스페인, 프랑스 해군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치면서 왕립해군은 거대한 해군 조직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를 계기로 영국은 유럽의 열강 중 한 국가로써 제대로 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상승세를 타던 영국왕립해군은 열강이었던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투인 트라팔가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치게 된다. 당시 왕립해군은 유럽 대륙의 침공을 막는 동시에 함대를 외국 밖으로 보내 힘을 과시하는 것도 가능한 거대한 조직이었다. 특히 해상 교역로를 막는 것이 핵심임무였기 때문에 상선, 범선, 군함, 전함 등 크고 작은 배들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육지에서 거대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 육군을 상대할 수 있는 인력과 숙련된 군사 또한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이러한 자국의 결점을 알고, 대부분의 인력을 해군에 지원하여 프랑스군을 막는 전략을 취했다. 육지에서의 인력을 해군에도 동시에 지원하는 특이한 전투 방식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설적인 영국의 제독인 호레이쇼 넬슨은 HMS빅토리 호와 함께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후 영국은 바다에서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 시기에 영국 왕립해군은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사력을 더한 것 보다 더욱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며 이후 1914년 까지 영국의 강력한 해군사적 우위는 계속 되었고 그 기세를 몰아 전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모습들은 포츠머스에 위치한 영국왕립해군박물관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박물관은 무기, 군복, 훈장, 배지, 배 모형, 전함 등의 크고 작은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해군의 훈련, 전쟁 시 각자 위치에서의 역할, 복지에 이르기까지 해군의 모든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나폴레옹 함대를 물리친 넬슨 제독의 초상화, 조각 작품들과 그가 활약했던 트라팔가 해전의 미술작품들은 강한 인상을 준다. 또한 박물관 내에 잠시라도나마 해군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적군함대를 물리치는 해전게임기를 통해 더욱 흥미를 돋우어 친숙하게끔 하였다.

영국왕립해군의 임무는 전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해군이라고 하면 해전에서의 임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국해군의 또 다른 임무 중 하나는 뒤에 더 자세히 설명할 삼각무역을 할 당시 무역상품인 ‘노예’를 수송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여기서 관리란 단순히 수송만 오가도록 감독을 한 것만이 아니라 노예를 수갑에 채우고 폭력을 행사하며 무자비한 행위를 저질렀다. 사실 삼각무역 당시의 노예무역은 영국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업이었지만 현재에 와서는 굉장히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들은 리버풀 알버트 독에 있는 국제 노예 박물관과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 카나리와프에 있는 도크랜즈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뒤에 삼각무역을 통한 해운을 설명하는 장에서 삼각무역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노예무역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2) 동인도회사와 삼각무역을 통한 해운

동인도 회사는 대항해 시대(1418) 당시에 아시아와 무역을 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이다.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부유하며 이름 있는 귀족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인도로 가는 배에 투자를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대양 항해에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났으며 인도와의 무역은 위험성이 컸다. 일부 상인들이 경쟁 회사들을 들이는 것에 반대하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동남아시아 교역을 하던 상인들에게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고,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주요 목적은 영국 정부로부터 아시아 무역독점권을 허가받은 후 식민지 개발과 교역을 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교역에 주력하고자 하였으나 네덜란드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로 인도를 대상으로 교역하게 된다. 인도의 주력 사업은 면직물 수입이었으며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에게 정치·경제적으로 강제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1617년 동인도회사는 정부로부터 인도 통상권을 허가받았고, 이후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의 무역시장을 장악하며 인도로부터 면직물의 수입과 공급을 독점하였다. 이윤을 획득하는 방식으로는 영국과 동인도회사 간의 순수한 쌍무적 무역, 동양 상품을 유럽에 재수출하는 방식의 중개무역, 아시아 여러 나라의 항구의 연결을 통해 이루어지는 연계 무역 등 다양한 형태로 무역을 진행하였다.

또한 해당시기에 무굴제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상품교역이 아닌 영토 확장에도 관심을 보였다. 인도의 경우, 인도 남동부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와 프랑스 동인도회사 간에 갈등으로 인한 카르나타카 전쟁(1744~1763)과 동부에서 발발한 플라시전투(1764년)를 모두 영국이 승리로 이끌며 인도에서의 지도권을 확립함과 동시에 인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계급사회인 인도의 파병문제로 발생한 세포이항쟁 이후에는 인도의 지배권을 빅토리아 여왕에게 넘겨주며 완전한 영국령으로 흡수되었고 이러한 실질적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동인도회사를 1874년 폐지한다. 그리고 프랑스 나폴레옹과 결투를 벌인 트라팔가 해전(1794~1805)에서도 연승을 거두며 이전에 실패했던 동남아시아로 진출을 시도, 해협식민지(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건설하며 승승장구하고, 18세기 이후에는 중국과의 무역교류 중 아편전쟁(1839~1842) 에서 승리를 얻어내며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게 된다(1842).

삼각무역은 17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크게 두 가지로 발달하였다. 첫 번째는 영국, 아프리카, 아메리카대륙을 연결시킨 것이다. 아프리카로 영국에서 생산된 완제품들이 수출되고, 그 대가로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송시켰으며, 아메리카에서 노예들에게 노동력을 강요하여 생산된 설탕을 자국과 주변 유럽 국가들로 수출하였다. 두 번째는 흑인 원주민들이 서인도 제도로 팔려 나가고, 뉴잉글랜드(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서인도의 당밀이 수출되는 형태이다. 이렇게 구성된 삼각무역의 특이점은 거래에 결정적이었던 주요상품이 앞서 언급한 설탕이나 당밀이 아닌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흑인 노예를 들이기 위해 많은 생산품들을 아프리카로 수출하였다. 아메리카에선 노예를 이용하여 설탕 플랜테이션 산업을 시작하였으며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발생된 이익은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즉, 삼각무역에서 영국은 상품수출과 선박을 담당하였고, 아프리카는 노동력을, 아메리카는 플랜테이션 원료를 제공하였다.

삼각무역에서 막대한 비중이었던 노예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리버풀에 있는 국제 노예 박물관을 방문하여 당시 노예무역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 올 수 있었다. 1700년 이후, 리버풀은 스페인·포르투갈·브리스틀·런던 등과 더불어 삼각 무역에 가담하여 면·가공품·흑인 노예 등을 아프리카·서인도 제도·미국·유럽 등과 거래했다. 리버풀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1709년에 리버풀에서 30톤의 노예무역선이 아프리카를 향해서 떠났다. 이것은 이 세기의 말엽에 리버풀이 구세계에서 가장 큰 노예 무역항이 되는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1703년에 리버풀은 노예무역 부문에서 15척의 배를 가지고 있었고 1771년에는 그 수가 7배로 늘어났다. 1709년에 리버풀 항이 소유하고 있는 선박 가운데 노예무역 선박의 비율은 100척 중에 한척 조금 넘는 정도였으나 1795년에 리버풀은 영국 노예무역의 5/8을 차지했고 전체 유럽 노에 무역의 3/7을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의 한 연구자는 1783년과 1793년 사이에 878척의 리버풀 선박들로 수송된 303,737명 노예들의 가치를 15,000,000 파운드 이상으로 추산하였으며, 수수료와 선박장비, 노예유지 비용을 감안하면 노예무역의 연평균 수익률을 30% 이상으로 결론내렸다.(Ibid, pp. 625-627) 노예무역으로 영국은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 반면에, 노예박물관에서 보았던 노예무역의 실체는 참혹하고 부끄러운 역사였다.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노예를 아메리카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 특히 반란과 자살이 잦았으며, 노예들에 대한 가혹하고 혹독한 대우가 노예들의 사망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에 노예무역선의 높은 사망률의 원인은 긴 항해 중 상한 음식물로 인해 질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런데 자연사도 있는가 하면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노예라도 바다로 내던져지면서 살해당했다. 이 부분은 리버풀 노예 박물관에서 봤던 충격적인 묘사 중 하나였다.(그림2 참조)

그리고 노예들을 초과 선적시키는 관행에 있었다. 노예상인의 유일한 목표는 배의 갑판을 흑인들로 빈틈없이 채우는 것이었다. 흑인 노예들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세로 5.5피트, 가로 6인치였다. 선반에 놓여있는 책처럼 정열되어 선적되었는데, 두 사람씩 두 사람씩 짝지어, 한사람의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가 다른 사람의 오른쪽 손과 왼쪽 손에 묶이었다. 노예들은 죽은 사람이 눕는 관에서 한 사람이 차지하는 것보다 좁은 공간에 결박되었다. 그것은 마치 검은 가축 때를 수송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한다.(Donnan, op. cit., Vol. 1, p. 132) 이처럼 노예들은 인권을 상실한 채 하나의 상품처럼 가혹하게 다뤄졌던 만행을 리버풀 노예 박물관과 카나리워프에 위치한 도크랜즈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인도 제도(아메리카)는 대영제국 경제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으며 영국의 번영에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삼각무역으로 인해 영국의 해운과 조선 분야에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플랜테이션 사업을 통해 영국의 많은 선박들은 곡물을 조공으로 받던 식민지로 향하기보다는 플랜테이션이 행해지는 서인도제도로 향한 배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리버풀의 앨버트 독이다. 리버풀의 앨버트 독은 1972년 폐쇄 된 부두이다. 과거 식민지들과의 교역이 행해지던 항만으로써 서아프리카와의 교류를 중점적으로 했던 곳이다. 앨버트 독은 서아프리카와 교류를 담당했던 항구였지만 실제 노예활동지역은 아니였다. 서아프리카에서 귀항하며 가지고 온 상품들을 저장하는 창고 및 컨테이너들만 있었을 뿐 노예는 아메리카로 직송되었고 수출된 흑인노예들은 아메리카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경작하는데에 쓰였다.

[그림1] 삼각무역을 보여주는 그림

[그림1] 삼각무역을 보여주는 그림

[그림2] 노예를 운송하는 과정에서의 대학살

[그림2] 노예를 운송하는 과정에서의 대학살

3) 포츠머스 조선소에서 발달 된 조선(造船) 기술력

열강들과의 해전에서 줄줄이 승리를 거두는 해군,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교역의 범위로 해양의 패권을 장악하던 영국이 계속해서 전성기를 누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업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단단하고 빠르게 만들어지는 군함과 교역에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다양한 상선들이 계속해서 개발되고 만들어지는 기술력은 대단했다. 따라서 영국은 지금까지도 이름을 알리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배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메리로즈 호’이다. 1496년에 왕립조선소가 포츠머스에 건립되었고, 1509년 왕위를 계승한 헨리 8세는 포츠머스 왕립조선소에 새로운 군함 두 대를 짓도록 명했다. 그중에서도 헨리의 누이 이름인 메리와 튜더가의 상징인 장미를 본 떠 만들어진 군함이 메리로즈 호 였는데 500t 규모를 자랑하는 이 군함은 왕의 기쁨이자 영국 함대의 기함이 되었다.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메리로즈 호는 계속해서 활약을 하다가 프랑스와의 전쟁 중 1545년 700여명의 군 인력과 함께 침몰하였다. 메리로즈 호의 갑작스런 침몰에 대한 정확한 사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영-프전쟁 당시 일제 대포 발사를 하고 난 후 포문이 닫혀있지 않은 상태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찰나 강풍이 불어 한 쪽으로 쏠린 무게와 당시 선체가 노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몰하였다는 추측이 알려진 내용이다. 비록 영-프전쟁 이후 메리로즈 호는 더 이상의 해전에서 활약하지 못했지만 이 배가 침몰 한 덕에 현대에서 영국 군함의 기술력을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메리로즈 호는 35년간 군함으로 이용되었으며 일제 대포 사격(한 쪽 면에 있는 모든 대포를 한 번에 발사)이 가능한 최초의 군함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영국 해군의 전투력이 대단하였음을 파악 할 수 있다.

또한 트라팔가 해전(1805) 당시,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HMS빅토리 호, 1860년에 건조된 영국 최초의 철갑전함 HMS 워리어 호가 이곳 포츠머스 조선소에 정박해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군함들이 포츠머스에서 만들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리처드 1세의 명으로 포츠머스 항구에 왕립조선소를 건설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포츠머스는 깊은 역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해군 기지가 되었다. 18세기에는 영국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조선소가 급격히 성장하였으며 19세기에는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포츠머스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해군 기지였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츠머스는 독일군의 집중적인 공습을 받아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영국 해양 역사에 남을 전함들을 건조했던 포츠머스는 1967에 역할을 다하고 문을 닫았다.

[그림 3] 인양 후 보존 중인 메리로즈 호

[그림 3] 인양 후 보존 중인 메리로즈 호

[그림 4] 넬슨제독의 기함 HMS 빅토리 호

[그림 4] 넬슨제독의 기함 HMS 빅토리 호

포츠머스 조선소에서 만들어진 많은 군함 뿐 아니라 삼각무역 또한 조선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삼각무역의 과정 중 노예무역을 위해 다른 형태의 선박들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선박의 형태를 바꾼 이유는 이동 중에 노예들의 사망률을 줄이고 더욱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선박 건조 또한 리버풀의 앨버트 독에서 행해졌는데 그 이유는 선박을 건조하는데 필요한 로프공장이 리버풀에 15곳으로 가장 많이 위치해 있었다. 리버풀 선원의 반이 의도치 않더라도 노예무역에 종사하였다. 조선 관련 업종에는 목수, 칠장이, 보트 제작자, 그리고 수리나 장비와 관계된 숙련공과 장인, 그리고 수수료, 독세, 보험관련 업종 등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삼각무역과 부분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리버풀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삼각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노예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선박을 만들어 이윤을 취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 영국의 가장 큰 교역의 이윤이 노예무역이었던 점을 봤을 때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조선기술의 발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2. 근대시대, 동아시아와 영국의 관계

전 세계를 무대로 많은 양의 교역을 했던 영국이지만 대항해시대 영국의 교역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를 연관시키기란 쉽지 않다. 당시만 해도 조선, 중국, 일본 모두 쇄국정책을 진행하여 외국과의 교역, 특히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도 있다. 그렇다면 대항해시대, 교역 강대국 영국은 동아시아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것일까. 쉽게 떠올릴 수는 없지만 역사적 사실을 비춰볼 때 접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중국과 일본은 비교적 나중에라도 다수의 국가들과 교역을 하며 문물을 받아들였고, 전쟁이나 큰 규모의 무역에 연관되어있어서 영국의 박물관에서도 비교적 쉽게 그들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었다. 또 역사적으로 크게 기록된 사건이 많지 않은 조선조차도 최근 부산 남구에서 영국의 배가 최초로 조선에 접촉한 기록이 발견된 바가 있다.
영국이 해양 분야에 관해 큰 명성과 세력을 떨치던 열강이라는 사실은 저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이 우리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아무리 대단한 나라더라도 우리와 전혀 연관이 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에 그친다면 유명한 소문을 듣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라는 우리의 세계와 해양문명의 강대국 영국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프로비던스 호’로 보는 영국해군의 모습과 조선(朝鮮)의 변화

최초로 부산에 상륙한 배는 어떻게 조선에 오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조선에 당도하게 되었을까? 그 해답을 가진 배의 이름은 providence, 브로튼 함장이 이끌었던 영국의 배이다. 그것도 그냥 상선이 아닌 영국 해군의 해양탐사선, 머나먼 땅의 해양탐사선이 먼 조선까지 왜 왔는지, 그리고 이 배가 조선에 내항함으로써 조선에 끼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한다.
대항해시대이후 영국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세계 해양강국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해군과 해양탐사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영국과 조선 사이에는 거문도사건이나 조영수호조약 정도의 접촉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우리나라의 기록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들지만 영국에서는 해양 탐사지나 항해기에 기록된 사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는 조선에 처음 당도하였던 영국의 배인 프로비던스호와 이 배의 함장인 브로튼에 대해 알아보고, 나아가 브로튼이 이끄는 프로비던스호의 방문 이후 그들이 가져온 조선의 변화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경쟁에서 후발주자였던 영국은 북아메리카, 인디아를 식민지로 편입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간 의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18세기 말이 되면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국 해군에게는 자국 상선의 보호뿐만 아니라 세계의 각 지역과 대양을 탐사, 측량하여 무역로를 개척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원자재의 확보와 상품 시장으로서의 식민지 개척을 위해 미답의 지역을 조사하여 지도와 해도로 기록하는 일은 영국해군의 중요한 임무였다. 북아메리카를 탐사한 밴쿠버 함장(Captain George Vancouver 1757∼1798)이나 태평양을 항해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을 탐사했고 3차의 세계일주 항해를 한 쿡 함장(Captain James Cook 1728∼1779) 등 해군에 소속되었던 영국인들 이 지리상의 발견에 한 획을 그었다. 유형수들을 동원하여 식민지를 건설할 새로운 영토를 찾고, 태평양이나 대서양의 여러 섬에서 식용 식물자원을 찾거나, 북대서양에서부터 캐나다 북극해를 경유한 후 북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로인 북서 항로를 발견하는 등 이들의 탐사항해는 본국의 상업적, 제국주의적 욕망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군선 에는 과학적 조사를 위해 학자들이 타는 경우도 있었는데, 다윈(Charles R. Darwin 1809∼1882)이 승선했던 비글(Beagle)호의 세계일 주 항해(1831∼1836)의 목적에는 남미 대륙 해안선의 지도를 작성하라 는 영국 정부의 명령도 포함되었으며, 그 이면에는 정치적, 수계 지리학적, 그리고 경제적 동기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김낙현, 2018; 홍옥숙, 2018, pp183-184). 이렇게 해군에 소속되어 있던 영국인 탐험가들의 활약으로 영국은 바다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성기를 맞이할 만큼 강성해졌다.

위의 글과 같이 영국 해군은 자국 상선의 보호는 물론이거니와 각 지역의 탐사 또한 중요한 임무였다. 그들의 탐사기록을 통해 무역을 하거나, 식민지로 삼거나 항로로 활용하거나 등의 쓰임새로 요긴하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련한 기록들은 필자가 방문했던 영국 도서관의 제임스 쿡의 항해 특별전, 포츠머스 왕립 해군 박물관, 메리로즈 박물관, HMS.33호, HMS WARRIOR 1860호, 리버풀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 그리니치 국립 해양박물관 등에서 관련 자료나 유물, 사진 등 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림5] 제임스 쿡 함장의 항해 관련 전시물 - 런던 카나리 워프 박물관 內

[그림5] 제임스 쿡 함장의 항해 관련 전시물 - 런던 카나리 워프 박물관 內

나폴레옹전쟁 이후 세계해양을 지배했다고 평가되는 영국은 전 세계 각지에서 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자국 선박의 안전을 위해, 또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목적을 위해 개척되지 않은 해양의 탐사에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영국은 세계 각지로 해군 탐사선을 보내어 자국선박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양탐사 및 지도의 작성 임무를 맡겼다. 세계 각지에서 실시된 영국 해군의 해양탐사 자료는 본국으로 보내졌고, 함장들 역시 귀국 후 본인의 항해기를 책으로 펴내었다. 그렇게 세계 각지를 탐사한 자료들이 서구사회에 더욱더 널리, 또 자세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알려진 정보들은 식민지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무역을 하기위한 무역로를 개척하는데 쓰였다. 나아가 각 분야 학자들의 궁금증을 유발시켜 모험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거기서 새로운 발견과 탐사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게 세계 각지를 항해하며 해양탐사를 했다면 당연히 우리나라, 조선에도 당도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도착에 관한 기록을 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 21년 9월 6일 壬申 1번째 기사에 그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내용을 보자면, “…異國船一隻, 漂到東萊 龍塘浦前洋。 船中五十人, 皆編髮, 或垂後, 頭戴白氈笠, 或籐結笠, 形如我國戰笠。 身披三升黑氈衣, 形如我國挾袖, 裏着單袴。 其人皆鼻高眼碧。 令譯學, 問其國號及漂到緣由, 則漢、淸、倭、蒙之語, 俱不曉解。 授筆使書, 則形如雲山圖畫, 不可曉得。 船長十八把, 廣七把, 左右下杉板, 俱以銅鐵片鋪之, 堅緻精完, 點水不透云。" 三道統制使尹得逵馳啓: "東萊府使鄭尙愚呈稱: ‘馳往龍塘浦, 見漂人, 則鼻高眼碧, 似西洋人。 且見其所載物貨, 卽琉璃甁、千里鏡、無孔銀錢, 皆是西洋産也。 言語聲音, 一未曉解, 惟浪加沙其四字, 卽倭語長崎島也, 似是商船之自長崎島, 轉漂到此者。 對我人以手指對馬島近處, 以口吹噓, 似是待風之意云。’ 命依其願, 候風發送 。…” (조선왕조실록, 정조 21년)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바로 영국 선박이 조선의 땅에 당도하여 영국인과 조선인의 첫 만남을 담고 있는 조선의 첫 기록이다. 이 기록은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과 삼도수군통제사 윤득규의 보고서로 작성된 것으로, 당시 용당포에 나타난 배의 외양과 승무원들의 모습 등을 설명하고 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배안에 있던 50여명이 모두 눈이 파란 서양인이며, 역관을 통해 중국어, 만주어, 일본어, 몽고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했지만 모두 알지 못해 의사소통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또한 글을 써보게 했더니 그림과도 같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97년 당시에는 영어를 쓰는 외국인을 맞은 것이 처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배의 길이는 18파(약 27m), 폭은 7파(약 7m)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21년)라고 배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동래부사 정상우의 보고를 들어 “아마도 상선이 표류하여 이 곳에 도착한 것 같다.”고 전했다.

[그림6] Portsmouth Historic Dockyard 內 HMS WARRIOR 1860호 의 모습

[그림6] Portsmouth Historic Dockyard 內 HMS WARRIOR 1860호 의 모습

이렇듯 실록내용에서는 상선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사실 그 배는 87톤급 군함으로 1795년 영국을 떠난 providence라는 이름을 가진 배였다. 아마 아래의 [그림6]와 유사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의 사진은 Portsmouth Historic Dockyard에서 복원한 HMS WARRIOR 1860호의 모습으로 1860년 건조 당시 영국해군의 최초 철제 전함이다. 건조 당시 전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1797년에 이미 항해를 하고 있었던 providence호보다 훨씬 더 발전한 모습이겠지만 이양선을 접해보지 못한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워리어호와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providence호는 윌리엄 로버트 브로튼(William Robert Broughton 1762∼1821)이 1793년 영국의 국왕 조지3세 (George III 1738∼1820)의의 명으로 함장이 되어 태평양과 북동 아시아 원정에 나선 배이다. 또한 400톤급 Sloop형 포함 HMS Providence호로 대포 16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115명의 승무원을 태운 배로 약 2년간의 장기항해가 가능한 영국해군의 군함이었다. 1795년 2월 15일 영국에서 출항하여 대서양을 횡단하고, 호주와 하와이를 거쳐, 1796년 6월 5일 북미 몬터리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브로튼 함장이 해군성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남미대륙 남서부해안을 탐사하는 것이었으나, 이미 영국 해군 군함 Dicovery호와 Catham호가 같은 탐사목적으로 출동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자기의 탐사지역을 동북아 해안인 조선해역과 일본 북부, 유구열도로 수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1797년 10월 13일, 일몰 경에 부산 용당포에 닿았다. 여기서 브로튼 함장과 그 일행들은 처음 조선 사람과 대면했고, 부산항을 탐색, 조사한 후 10월 21일 이곳을 떠났다(김재승, 1996, p220). 세어보면 조선 땅에서의 체류는 딱 9일 정도였다. 이 9일 동안 행해진 그들의 해양탐사 기록이 조선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프로비던스 호의 함장이었던 영국 해군장교 윌리엄 로버트 브로튼이 귀국하여 1804년 런던에서 출판한 그의 “북동항로로의 항해”가 유럽에 소개되고 나서 동북아 해역으로 항해하고자 하는 많은 군함, 탐사선, 상선, 포경선들에 의해 이 항해기가 널리 읽혀졌다. 16세기 이래로 영국이 작성한 세계지도와 해도는 당시 세계해양탐사와 식민지 획득이라는 국가적 사명을 안고 있던 서구 열강에게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영국이 조선해역에서 탐사하고 출판한 항해기 역시 동북아 지역으로 항해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에게는 필독서가 될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또, 이것이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의 신비로운 나라, 조선이 서구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그의 책에는 조선을 자신의 항해기에 ‘Corea’의 ‘초산’(Chosan 또는 Thosan)에 입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9일간 부산에 머무르면서 항구의 모습과 산의 지형, 해안선의 형태 등을 조사하고, 항해 중에 기록한 나침반의 변화, 기압과 온도계의 상태, 일일 항해 거리, 위도와 경도 등을 적은 표, 인수어, 오키나와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숫자,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와 한국에서 자라는 채소의 이름을 채록하여 만든 표도 함께 첨부하였다(김낙현, 2018; 홍옥숙, 2018, p196). 실제로 그의 책에는 조선어 낱말 38개가 실려 있으며 26종의 식물 표본을 채집해간 기록도 나와 있다.

브로튼이 부산 용당포에 다녀간 이후, 그가 발표한 책 「북동항로로의 항해」는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덕분에 많은 서양선박들이 해양탐사, 통상요구 또는 선교 등을 목적으로 조선해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은 당시 해금정책에 의해 외부인과의 접촉을 엄격히 통제했고 좀처럼 쇄국의 빗장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동양의 조그마한 소국인 조선이 해양강국 영국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게 되자, 서구 열강의 무역선들은 앞 다투어 동북아 해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일부 선박들은 조선해역에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영국 해군 탐사선 Providence호가 부산포에 기착한 이후 영국 해군이 파견한 많은 군함들도 해양탐사의 목적으로 조선해역에 나타났지만, 아편전쟁 이후에는 무역선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그들이 조선을 떠날 때 망원경과 영국제 총을 선물로 주고 가기도 했는데, 이는 해금정책으로 서양의 문물을 접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후에 ‘황사영 백서’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인 황사영이 이 때의 프로비던스호를 보고 군함의 규모에 충격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고도 전해진다. 프로비던스 호의 용당포 내항사건은 당시 강력한 해금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영국 해군의 한반도 탐사항해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1804년에 브로튼이 항해기를 출판하면서 많은 서구 열강들이 조선과 용당포(부산항)을 인지하고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1854년에 러시아 Putiatin제독의 극동순방함대가 조선해역에 들어온 것도 영국 해군이 탐사한 보고서를 읽은 덕분이었으며, 1866-1868년에 일어난 유태계 독일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을 포함한 3차의 조선 내왕도, 조선 서해안에 대한 항로지식을 영국에서 출판된 항해기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또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燒破된 사건을 탐색 차 1867년 1월 조선에 온 미국 군함 Wachusett호의 Robert S. Shufeldt 함장도 영국 해군 Edward Belcher 함장의 항해기를 통해 거문도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1686년 프랑스 극동함대와의 강화도 전투(병인양요), 1871년 미국 태평양함대와의 강화도전투(신미양요) 등 19세기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서방세계와의 충돌사건에는 빠짐없이 영국해군이 탐사한 조선해역 탐사자료가 이용되어 왔다. 또 1885년에 발생한 영국 해군의 거문도 무단 점거사건은 서방 강대국 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세력싸움으로, 한국과 영국 간에 지울 수 없는 汚點으로 남는 사건이었다. 이 점거사건의 根源을 찾아보면 1845년 거문도를 탐사한 영국 해군 군함 Samarang호의 탐사보고서가 출판되어 서양세계에 이 섬의 효용가치가 알려진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김재승, 1996, p220).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조그마한 탐사기록이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조선이라는 한 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조선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영국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작은 정보들이 모여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영국은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고 그것을 알지 못했던 조선은 다른 운명을 맞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영국이 행한 해양탐사활동 및 그 이후의 한·영관계는 관심과 연구가 부족하여, 오늘날 잊혀진 일로 되어가고 있다. 즉, 우리는 영국이 거문도에서 행했던 거문도 사건은 알고 있지만, 2년간 4~5,000여명의 영국인이 다녀가면서 남긴 흔적이나 그들이 조선사회에 남긴 영향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영국의 해양탐사가 단순히 조류를 측정하고 해도를 작성하는 탐사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해양 탐사 뿐만 아니라 동식물 채집, 언어채집, 주민의 생활, 풍속과 같은 광범위한 조사활동을 병행했다. 그리고 함장들은 탐사를 마치고 귀국하여 탐사항해기를 출판하는 것을 최대의 영광과 자부로 여겼다. 브로튼을 포함한 영국 해군의 조선해역 탐사보고서에는 당시 조선의 해양뿐만 아니라 조선사회의 생활상이 그대로 담겨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그러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들이 세계 각지에서 영국 본국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이번탐방에서 브로튼의 기록을 볼 수는 없었으나 해군과 해양에 관련된 곳들을 다수 방문했다. 바로 포츠머스 왕립해군박물관, 그리니치 해양박물관, 리버풀 해양박물관이다. 이 곳에서 영국 왕실 하의 해군 탐사대의 항해 기록과 수집품들, 학자들의 연구물, 지도, 해도 등으로서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 했으며 모으는 정보의 범위도 방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번에 영국도서관(구 대영도서관)에서의 제임스 쿡의 항해 특별전에서는 제임스 쿡의 3번의 항해에서의 육지에 내렸을 때의 모습들을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그 모습과 조선에 상륙했을 때의 브로튼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전시에서의 쿡 선장의 항해를 보면 먼저 그들은 육지에 상륙하기 전부터 이미 나침반 등으로 경도를 계산하고 항로일지와 해도와 지도를 그린다. 그런 다음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상륙하여 여러 가지를 탐색한다. 식물과 동물, 지역의 전통 문화와 사람들의 모습, 생활상, 언어, 서적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조사하고 기록했다. 이 전시에서도 박제되어 번호가 매겨진 다수의 동물과 곤충, 식물들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여러 점의 그림과 다양한 보고서와 같은 글을 보면서 대영제국의 해양력의 기반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포츠머스의 메리로즈 박물관에서는 1545년, 메리로즈호가 침몰하면서 그대로 수장되었던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전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당시의 영국해군의 생활모습이나, 배의 형태, 당시의 유물들 등을 생생하게 살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항해를 하면서 다양하고도 체계적인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강대국의 길로 향해갔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며 영국과 조선에 대해 알아보고,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한 글귀가 떠올랐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상업을 지배하고, 상업을 지배하는 자 세계를 제패할 것이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탐험가 Walter Raleigh경이 했던 말이다. 필자는 이 문장이야말로 영국 그 자체를 나타내는 문장이며, 영국이 당시에 나아가고자 했던 방향성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영국은 실제로 바다를 지배했고, 상업을 지배했고, 세계를 제패했다. 월터 롤리경의 말처럼 말이다.

2) 영국의 홍차문화 성립과 중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국을 생각하면 그 어떤 음식문화보다도 ‘홍차’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영국에서 ‘홍차문화’는 깊게 자리 잡고 있고 영국을 상징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홍차문화가 성립한 요인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역사적 요인이 내재해 있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역사적 요인에서 중국과의 무역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어떻게 바다 건너 멀리 있는 중국이 영국의 차 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중국은 차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약 15세기~ 16세기까지는 중국 내부의 해금정책을 통해서 해양 운송업이 활기차지 못했기 때문에, 차는 단지 육상로인 비단길을 이용해서 중국 인접 국가들에게 유통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유럽은 동양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차를 포함한 동양의 여러 물품에 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비단길을 통한 교역으로는 만족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이었고 설상가상 1453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면서 육로를 통한 교역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각국은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은 지리적 요건과 종교개혁 등 내부 상황 때문에라도 바다로 관심을 돌렸고 일찍이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통해 우위에 서기 시작했으며 동인도회사를 설립해서 엘리자베스여왕으로부터 독점권을 얻은 뒤, 네덜란드와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을 넓혀나가기 시작한다. 여기 이 동인도 회사가 영국과 중국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과 중국이 동인도 회사를 통해서 직접적인 무역을 실시하게 된 것은 18세기인데, 바로 영국인들이 홍차에 눈을 뜨면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영국은 19세기 전 까지 물을 정화하는 기술이나 저온에 우유를 살균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식수가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하수도 시설 또한 엉망이어서 오물이 템즈강으로 그대로 배출되어 도시에는 악취가 가득했다. 그리고 이런 물을 런던 시민들은 마시고 살았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식수 대신에 알콜, 즉 술을 많이 섭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염된 물을 피하고자 술을 마시는 것은 사회적 문제를 많이 야기했다.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니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고 결근도 많이 생겼다. 이런 영국인들을 구제한 것이 바로 차였다. 18세기 초반에 차가 왕실에서 상류층으로 내려오면서 상류층의 식탁에서도 술 대신 차가 등장하고 술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식탁에 올라온 차는 서서히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차를 내놓는 관습으로 확산되어갔고 차의 소비량은 점차적으로 늘어갔다. 그러다보니 식품점, 커피하우스, 잡화점에도 차가 판매되기 시작했고, 서민들은 상류층을 흉내 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차를 마시면서 상류층 기분을 내보고자 했다. 또한 도시노동자들에게도 훌륭한 음료였기 때문에 소비가 많아졌다. 이렇게 차는 영국인들 생활 속에 서서히 스며들어가서 전 계층이 즐기는 음료로 바뀌게 되었고 18세기 말이 되면 영국인들에게 ‘차’라는 존재는 필수품이 된다. 이렇게 점점 수요가 많아지게 되자 무역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1780년대, 영국동인도 회사는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중국은 청나라로, 선진 국가였고 서양국가의 배에 실은 나침반, 화약, 책자 등 웬만한 물품은 중국에서 발명한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자급자족이 충분한 국가였기 때문에 유럽의 물품들에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청나라는 영국에게 차를 많이 수출했던 반면에, 영국의 수출품은 대부분 모직물 면직물이었고 청나라는 당연히 영국의 면직물을 사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은 청나라와 개항을 통해서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영국은 차를 구매할 은이 부족해져갔고 무역에서 적자가 계속 되풀이 되자, 영국은 아편을 이용하여 무역 적자를 해결하고자 했다.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약재나 마취제, 또는 담로 아편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전파되는 것은 비교적으로 쉬웠고 아편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오죽하면 후반에는 결제수단인 은을 대신하기도 할 정도였다. 청나라는 여러 번 금지령을 내렸지만, 영국은 무역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고 결과 청나라는 아편으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 정부는 아편을 몰수해서 소각하는 등 강경대응을 했고 영국은 이 행동을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 전쟁이 바로 유명한 아편전쟁이다.

아편전쟁은 총 두 차례로 나뉘어 전개되는데, 19세기 중반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은 1차 아편전쟁 이후 난징 조약을 체결해서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해서 무역항을 늘리고 수입이 증대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영국의 무역 영향력이 청나라에 기대만큼 미치지 못하자 애로호사건을 빌미로 프랑스와 연합해서 청나라를 공격한다. 이로 인해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결과는 톈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영국의 원료 공급지로 전략하게 되고 만다. 중국은 어떻게든 보복하고자 중국 차 출항을 금지시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차나무는 아쌈에서 재배하기 시작했었고 1839년에는 런던 시장에 도착해서 다른 지역으로 널리 퍼지게 된다. 그리고 186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인도 남부에서도 차를 재배하는데 성공해서 스리랑카에서도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차의 운송업자들은 거의 미국선박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해양강국인 영국인의 자존심을 긁었다. 결국 영국은 미국 선박의 속도를 압도하고 중국차를 신속하게 운송하기 위해서 커티샥 (Cutty Sark)이라는 거대한 범선을 발명하게 된다. 현재에도 그리니치 근처에 커티샥 박물관이 따로 위치해 있는데 박물관 안에 중국의 이야기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7] 커티샥 박물관 전경

[그림7] 커티샥 박물관 전경

이렇게 영국에서 생산되는 차의 양이 많아지게 되면서 공급이 원활하게 되자 차의 가격은 하락하면서 19세기, 우리가 잘 아는 홍차문화가 탄생한다.
영국인들은 말 그대로 새벽부터 밤까지 홍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시간대 마다 명칭이 다 있을 정도인데 차례로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새벽 6시경에 마시는 얼리 모닝 티(early morning tea), 오후 4시경에 마시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오후 6시경에 마시는 티는 하이티(high tea)라고도 하며 미트 티(meat tea)라고도 한다. 늦은 저녁에 마시는 차는 애프터 디너 티 (after dinner tea), 잠자리 들기 전에 마시는 차는 나이트 티(night tea)라고 한다. 그리고 일 중간에 마시는 티를 티 브레이크(tea break)라고 한다. 아침식사, 점심식사 후에도 홍차를 마시지만 여기에는 따로 명칭이 붙어있지 않았다. 보통 애프터눈 티와 애프터 디너티는 여유와 사교를 상징하기 때문에 중 상류층에서 즐겼고, 하이티는 식사와 함께하기 때문에 서민들이 주로 즐겨마셨다. 노동자들은 작업에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티 브레이크를 즐겼다고 한다. 영국인들에게 이렇게 문화로 자리 잡은 차는 이제 단순히 기호식품이 아닌 어떤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차를 마시는 시간을 통해서 대인 관계를 결속하고 차를 준비하고 대접하는 행위에서 예의를 배워나갔다.

평면 지도를 기준으로, 중국과 영국 두 나라는 바다의 양 끝으로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나, 영국이 해양의 중요성을 더 빠른 시기에 인지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대항해시대의 후발주자로 시작했으나, 산업 발전에 있어서는 가장 앞서나갔던 영국은, 이전부터 그들의 환경에 놓여있던 바다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해양 교류를 통해 그들 자신을 성장시켜갔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그들의 문화 역시 해양 교류를 통해 영향 받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앞으로도 바다를 통해서 다른 요소가 도입되고 그 요소가 다른 한 국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중국의 차로 영국이 홍차문화를 탄생시킨 것처럼 우리나라도 어쩌면 해양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는 해양산업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야한다.

3) 영국의 해양문명을 배워간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

초기 폐쇄적이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개방적인 태도로 외국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섬나라라는 비슷한 지형적 형태를 띤 해양강국 영국의 해양문명을 많이 수입하고 학습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과는 달리 직접 탐방했던 영국의 수집관에는 일본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대영박물관이나 영국도서관 등에서 간혹 보이던 일본의 그림도 직접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가져온 유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나 덴마크가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유물을 영국이 다시 가져와 전시해놓은 형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과의 교류를 현지에서 직접 학습하고 경험하려했던 초기의 목적을 이행하기에는 자료의 양이 부족했다. 따라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영국에 파견한 사절단 중 필자의 탐방 경로와 비슷한 일정을 수행했던 이와쿠라 사절단의 기록들을 따라가며 그들의 파견기를 재현해보려 한다.

먼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1867-8) 이후에야 해양강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일본은 조선통신사 일행뿐 아니라 그들이 타고 온 선박을 보고 놀라 경외심을 가질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문화와 허약한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해양활동은 흔히 ‘왜구’로 불리는 해적활동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은 극동 3국(청·조선·일본) 중에서 서구문화를 가장 신속하게 그리고 거의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은 극동지방에서 러시아를 견제할 대리국으로 일본을 택한 영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서구식 경제와 군사제도를 완성한 일본은 청일전쟁(1894-5)과 러일전쟁(1904-5)에서 연거푸 승리했으며, 나아가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명실상부한 극동의 패권국이었다(한국해양재단, 2011, p34). 이렇듯 외국문물을 비교적 늦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은 발전된 해양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방법 중 하나로, 사절단을 해외로 파견하여 그들의 해양문명을 학습, 자국의 근대화 촉진에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사절단이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사절단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으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메이지 4년부터 6년까지 미국과 유럽에 파견되었다. 그들의 해외 파견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미국, 영국, 유럽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재협상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구조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여러 국가로 파견된 대규모 사절단이었던 이와쿠라 일행은 방문하는 나라마다 이목을 끌었다. 각 나라에는 그들의 방문 기록이 더 타임즈(The Times), 맨체스터 가디언지(Manchester Guardian) 등에서 보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특히 이와쿠라 일행의 정보수집이 빛을 발한 국가는 일본보다 앞선 기술로 산업도시가 구축되어 있었던 영국이었다. 이와쿠라 일행의 첫 번째 목적이었던 불평등 조약 재협상이 워싱턴에서 좌절되면서 그들은 두 번째 행선지였던 영국에서도 조약 갱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런던에서 이를 관철하겠다는 의사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보다 면밀히 근대화 된 해양도시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총력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이와쿠라 일행은 방문하는 나라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를 하나라도 더 자세히 관찰하려고 했으며,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 각국이 어떻게 그와 같은 국력을 갖추게 되었는가를 살피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사절단이 영국에 방문했을 때는, 수도인 런던에만 주로 체류하지 않고 전국의 주요 산업도시도 빠짐없이 방문해 그곳의 대표적인 공장과 산업시설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예방하기로 한 빅토리아 여왕이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 사절단은 영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근대 문명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산업도시들을 답사했다. 영국의 주요산업인 섬유 조선 제철 기계 분야의 유수한 공장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은 생산과정과 각 단계별 공정을 세밀하게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도시의 전반적인 실태를 기록했다. 이 내용만으로도 빅토리아 시대 영국 경제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이영석, 2013, pp28-31). 즉, 해양문명의 중심지인 영국을 탐방하기 위한 이번 여정의 목적과 이와쿠라 사절단의 목적이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 당시에도 해양문명과 산업기술로 발전 된 영국의 명성을 익히 알고 배움을 얻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영국의 앞서가던 기술과 문명을 습득하기 위해 수많은 도시를 탐방하고 기록을 남겼다. 사절단의 영국 여정은 어떠했는가. 8월 17일 런던에 도착한 이래 그들은 9월 28일까지 런던에 체류하면서 런던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을 들렀고, 인근의 브라이튼과 포츠머스를 방문했다. 포츠머스에 방문했을 때는 해군 조선소에 들러 건조 중인 최신형 군함에 오르기도 했다. 그 후 산업도시 시찰에 나선 이와쿠라 일행은 리버풀, 맨체스터, 글래스고, 에든버러, 하일랜드, 뉴캐슬, 브래드퍼드, 셰필드, 스태퍼드셔, 코번트리, 버밍엄, 체셔 등지를 거쳐 런던으로 돌아왔다(이영석, 2013, pp32-33). 비록 이와쿠라 사절단의 여정처럼 영국의 도시 곳곳을 방문할 수는 없었지만, 영국 해양, 산업 문명의 대표지라 할 수 있는 포츠머스, 리버풀을 탐방하는 것으로 그들의 여정을 재현할 수 있었다. 특히 이와쿠라 사절단이 보았다는 포츠머스의 해군 조선소는 현재까지 그 장엄함이 유지되어 있다. 당시 해군과 조선기술 분야에 강국이었던 영국은 다양한 형태의 군함이 있었다. HMS-워리어호, HMS-빅토리호, HMS-M33호등의 선박이 해전 당시 모습을 잘 떠올릴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선박의 견고함이나 웅장함 등이 보는 순간 느껴졌다. 해전이나 전쟁과는 거리가 먼 현재에도 느껴지는 군함의 장엄함이 이와쿠라 사절단에게 느껴지지 않았을 리 없다. 실제로 이와쿠라 사절단이 다녀간 이후 영국과 일본 관계의 가장 큰 수확은 무역량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수입한 함정 26척 가운데 11척이 영국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와쿠라 사절단이 영국의 함정을 보고 느껴졌을 조선기술의 우수함을 유추 해보게 된다.

[그림8] HMS 빅토리호

[그림8] HMS 빅토리호

[그림9] HMS 워리어호다

[그림9] HMS 워리어호다

사절단은 런던이나 지방 도시들이 보여주는 근대적 풍경에도 매료당했다.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조망하면서 실기의 저자는 영국 정치의 기본 성격을 새롭게 성찰하기도 했다. 다양한 도시 특성을 살피면서, 그 다양성이 바로 영국 사회의 본질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 주변에서는 왕권의 위엄과 입헌군주제의 가치를, 런던 도심과 지방 도시들의 기업들에서 자유가 보장된 공화정의 가치를, 그리고 농촌의 전원지대를 돌다보면 귀족의 전제적인 통치를 연상하게 된다는 것이다(이영석, 2013, p48). 이와쿠라 사절단의 영국 방문기가 상대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영국의 중심지인 런던만 머물지 않고 주변 산업도시, 지방도시를 많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근대화에 대한 기술과 산업적 부분에서 많은 것을 탐방하고자 했던 이와쿠라 일행의 당연한 여정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영국의 정치적 시스템이 잘 드러나 있는 런던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900년에 걸친 입헌군주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건축물이다. 1834년 화재로 소실 된 이후 1835년 새로 건축 된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의회가 있던 자리는 중앙 탑의 남쪽으로는 상원 의사당을, 북쪽으로는 하원 의사당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입헌 군주국의 위엄과 양원제의 원칙을 웅장하게 보여 준다.

[그림10] 웨스터민스터 사원

[그림10] 웨스터민스터 사원

1066년 이래 모든 영국 국왕들의 대관식을 거행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의회 역사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왕좌는 그 뚜렷한 상징이다. 왕이 하원의원들에게 성 스테판 예배당을 하사하였던 1547년 이전까지는 궁에 의사당이 없어서 하원의원들은 수도원에서 의회를 열기도 하였다. 사실 그 당시 일본은 영국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여정을 분석한 보고서인 『실기』의 저자는 “국토의 형태나 위치, 면적 게다가 인구까지도 일본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동양의 영국이라 부른다.”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양에 관련한 힘으로 봤을 때 영국은 일본과 다르게 유럽 가운데 가장 강국이었다. 일본은 그러한 이유를 산업기술, 공업의 발달 등에서 찾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기술 발달의 근원은 영국인의 국민성, 자질, 기업가 정신 등 영국의 시스템에서 찾기도 했다. 지방의 도시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달된 기술력을 체감했다면 중심지인 런던에서는 입헌군주제를 담고 있는 건축물이나 자유로운 공화정의 가치가 영국의 국력에 미치는 영향력을 파악한 것이 아닐까.

또한 사절단은 지방도시나 건축물 등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하는 탐방과정 뿐 아닌 박물관에 방문하기도 했다. 사절단에게 도시는 어느덧 근대 서구문명과 문화의 전시관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처음 들린 박물관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전시물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실기』 의 저자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동양의 옛말을 떠올린다. 말 그대로 눈으로 배우고 느낀 것은 귀로 듣고 느낀 것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는 박물관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어느덧 진보의 의미를 깨닫는다. “어느 나라든 발전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느 날 갑자기 발흥한곳은 없다. 반드시 순서가 있다. 먼저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후대에 전해주고 선각자에게 물려받은 것을 다시 깨우쳐 전해주면서 점차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을 진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진보란 낡은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옛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있다(이영석, 2013, p48). 이와쿠라 사절단이 방문했던 당시의 영국에도 그 시점까지의 발전 과정을 기록한 박물관이 있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박물관인 대영박물관도 1759년부터 개관을 했고 내셔널 갤러리도 1824년 개관을 했다. 모두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1868년대 이전부터이므로 이와쿠라 사절단이 방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박물관들은 과거의 시점에서 현재까지에 이르는 더 많은 역사를 가지게 되었지만 과거의 시간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절단 일행이 박물관을 통해 해양강국으로써의 영국이 갑자기 거둔 성과가 아님을 알았듯 박물관을 탐방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거대한 과거의 시간들을 지나칠 수 있는 중요지이다. 특히 박물관 소장품이 많고 각각의 유물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들 또한 많은 영국의 박물관들은 사절단이 영국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불평등조약개정이라는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사절단 일행이 많은 공장을 방문해 얻게 된 정보와 지식이 일본의 산업화에 큰 자극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사절단이 방문한 몇몇 공장의 경우 일본에 대한 수출이 급속하게 증가하기도 했다. 뉴캐슬의 암스트롱 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1905년 당시 일본이 해외에서 들여온 함정(전함, 순양함, 호위함) 26척 가운데 11척이 암스트롱 사에서 건조한 것이었다. 또 1871-1911년간 일본에 수출된 영국제 증기기관차는 1,023대였는데, 사절단이 공식 방문한 글래스고의 덥스(Dubs)사와 노스브리티시(North British)사 제품이 총 505대에 이르렀다.(이영석, 2013, p52) 즉, 일본이 영국으로부터 그들의 발전된 기술을 학습해 간 것 이외에도 영국과 일본 사이, 실질적인 수출량이 증가하여 양국의 관계 또한 발전하였다. 사절단 탐방으로 영국의 기술력에 놀라고 호감을 느낀 일본의 당연한 행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일본의 사절단이라고 해서 영국의 모든 면에 긍정적인 평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문명국의 도심과 지방간의 극심한 빈부격차에 놀라기도 했고, 산업이 발전된 도시인 리버풀 등에서는 매연과 석탄 연기로 까매진 하늘을 보며 이러한 연기가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의 선진화 된 기술력과 해양문명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영국은 해양강국이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선진문명을 사절단은 직접 보았다. 앞서 『실기』의 저자 또한 언급했듯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동양의 옛말은 이와쿠라 사절단도 느꼈고, 그들의 여정을 재현한 이번 탐방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Ⅲ. 결론

본 논문은 대영제국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국을 근대의 영국과 현대의 영국, 그리고 바다를 재패했던 영국이 동아시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하면서 대항해시대, 세계를 제패하고 해양문명의 기틀을 세운 영국의 발전과정과 그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들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확인해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대의 영국은 해군, 해운, 항만 세 가지 요소로 살펴보았다. 첫 번째로 해군을 살펴보았다. 해군은 영국 해군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1707년을 기점으로 영국왕립해군을 대표적으로 꼽았다. 왕립해군이 들어오고 난 이후, 영국이 다방면에서 변화하고 진화하게 되었으며 왕립해군 자체도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왕립해군은 트라팔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는데 큰 활약을 했을 뿐 아니라 해상 교역로를 독점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영국은 제대로 해군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바다를 선점하는데 박차를 가한다. 다음으로는 해운 요소이다. 영국의 해운은 대표적으로 동인도 회사를 꼽을 수 있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교역 뿐 아니라 플라시 전투, 트라팔가 해전, 아편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이끄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식민지와 영토 확장에 중심이 되었다. 그로 인해 삼각무역이 탄생하고 이는 영국의 경제적인 부분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해양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기술적인 부분인 항만이다. 영국이 계속해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바로 군함을 만드는 기술력이다. 포츠머스의 왕립조선소에서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최초로 일제 대포 사격을 가능하게 했던 군함인 메리로즈호를 기점으로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를 이끈 HMS빅토리호, 또 HMS워리어호 등 여러 군함들이 존재한다. 해전 뿐 아니라 삼국무역 중 노예무역도 영국의 조선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리버풀의 앨버트 독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하였다.

이렇게 영국의 해양 권력이 세계적으로 우세했다면, 동양권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기에 각각 조선, 중국, 일본으로 나뉘어 확인해보았다. 먼저 조선의 경우, 영국의 배인 프로비던스호가 방문하면서 준 영향을 실록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표류해서 도착하게 된 이 배가 조선을 탐사한 것을 일지로 작성하면서 조선이 서구 사회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이 쇄국에서 개방을 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영국이 행한 해양탐사활동 및 이후의 한영관계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함으로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삼아야할 문제이다. 두 번째로는 중국과 영국의 교류를 중심에 두고 살펴보았다. 영국의 내부적인 상황으로 차 소비량이 많아짐과 동시에 중국으로 진출을 했고 이는 아편전쟁을 유발시키고 중국을 강제로 문호 개방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차 무역을 위해서 조선 기술력 또한 발전시켰음을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해양 교류를 통해 ‘차’라는 작은 요소가 한 국가의 상징적인 문화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마지막으로는 일본이다. 일본은 다른 두 국가와 다르게 주체적으로 해양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움직였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일본은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해서 불평등 조약을 재협상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서양 열강의 해양 문화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그 중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은 일본보다 앞선 기술로 산업도시가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많은 정보와 지식을 기반으로 산업화를 구축하는데 전력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은 1905년에 해외에서 들여온 함정 대부분이 뉴캐슬의 암스트롱 사에서 건조한 것을 들 수 있다.

역사에서 해양은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졌으며 어떤 식으로 해양을 이용하는 가에 따라서 한 국가의 미래가 결정되기도 했음을 영국을 통해서 확인해 보았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쇄국정책으로 인해 시대에 발맞춰 바다로 눈을 돌리지 못했고, 냉전 시기는 물론 냉전 시기가 종결된 이후에도 안보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양 정책에 시선을 돌려 시도할 방안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한국은 ‘바다’라는 요소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이용하지도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문은 과거 해양에서 전성기를 이룩했던 대표적인 강대국인 영국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성공을 우리나라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과거 대영제국의 성공을 대한민국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좋은 것이었을까.

과거 해양의 역할이 해전과 교역에 이르고 그로 인한 국가의 경제력과 권력이 아주 밀접했을 당시, 영국의 해양을 활용하는 능력과 그 성공적인 결과는 국가에 상당한 이바지를 했음을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근대에서 현대에 걸쳐 시간이 지나오면서 해양에서 모든 패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세계를 제패하던 영국은 더 이상 없다. 물론 그렇다고 영국이 이제 힘을 잃은 약국이라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영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서서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는 힘 있는 나라다. 그러나 근대시대의 상황과 환경을 현재의, 현대의 대한민국에 반영하는 것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이 해양을 제패했던 이유는 당시의 상황과 환경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섬나라라는 그들의 자연적 위치를 활용하여 많은 부두를 만들어서 교역을 했고 해전에 동원할 해군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자신의 결점을 파악하여 육군을 해군에 동원하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만큼 다른 나라의 문물을 들여오고 교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당시 가장 이익이 컸던 교역품목을 발전시키기 위해 개량된 배를 만들고 더 큰 이익을 창출했다. 만약 그 당시의 대한민국, 즉 조선이 이러한 영국의 실정을 학습하고 반영할 방법을 찾았다면 해양 강대국으로써 이름을 떨치던 조선이라는 역사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해양 열강들을 찾아가 학습하고 반영했던 일본처럼 말이다. 하지만 21세기에 근대 영국의 해양발전 방법을 학습하는 것은 그다지 실효성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의 바다를 바라봐야한다. 21세기의 바다는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가권력을 쥐기는 힘들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교역상품도 많이 달라졌고 배를 만드는 기술은 이미 영국에 버금 갈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 섬나라인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한 면은 육로로 나아갈 수 있는 반도국이다. 물론 현재 분단국가라는 제약으로 지형적 특성을 마음껏 활용할 수는 없지만, 이를 해결해서 발전할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근대의 빈부격차나 환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현대에도 같은 문제로 골치를 썩는 영국의 사회적 문제는 반면교사로 삼아 과거에 겪었던 국가적 차원의 문제를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국이 이룩한 해양문명은 그야말로 거대했다. 그 때 닦아놓은 국가의 기틀이 여전히 영국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근대의 바다를 바라보고 당시 자신의 나라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개발한 결과다. 근대의 바다와 현대의 바다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영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개념은 유효하다. 현대의 바다를 바라보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발전 가능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 해양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인력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항상 미래를 위한 일이듯, 근대 영국의 시각은 현대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이번 탐방을 통해 해양문명의 깊이를 자세히 알게 되면서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는데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통해서 발전을 이룩한 데에 있어 중요한 근본적인 개념을 배우고 우리가 놓인 현재와 미래에 적용하여 현실에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직접 체험하고 몸소 느껴보는 답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에 있어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 탐방의 목적대로 영국의 발전양상을 알아보기 위해 그 역사의 발자취를 직접 따라 가보는 역사지 답사가 책상 앞에 앉아서 역사책을 통해 얻는 역사적 지식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현대에 들어서 대부분의 역사적 지식은 역사 관련 전공이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시간적, 경제적 여건의 한계로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 인터넷에서 검색 한 번을 통해 쉽고 빠르고 아주 방대하고 자세한 정보를 획득할 수가 있다. 이런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학과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역사지 답사를 할 일이 드물기도 하고, 어차피 역사는 답사를 한다고 해서 과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답사는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비효율적이라고 바라봐지는 측면이 있어서 이해를 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탐방이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우리가 흔히 영국의 역사라고 하면 대항해시대의 승승장구하던 영국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고 대영제국 또한 당연히 떠오르는 단어이다. 역사 속 대영제국이 현대에 와서 받는 평가는 영국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대내적 관점과 대외적 관점의 온도차이가 확연함을 알 수 있다. 영국이 자국을 바라보는 대내적 관점에서 대영제국은 대항해 시절 전 세계 해양국을 제패하던 세계 강국 1위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명성을 떨쳐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세계 1위의 지위를 가진 부분에 있어서는 대외적으로도 인정받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외적 관점에서는 영국이 해양제국 1위로 성장을 한 만큼 전 세계 1/4에 해당하는 수많은 국가들을 침범하여 식민지로 삼고 그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여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아픈 역사를 남겼다고 바라본다. 그래서 극단적인 비판으로는 영국왕립해군은 해군이 아닌 타국의 영토와 지배권을 갈취하고 타 국민을 노예로 전략시키는 해적이라는 견해도 난무하다. 이렇게 역사만 놓고 보았을 땐 영국이 해양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며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팀의 탐방국가는 영국으로서 직접 방문하여 확인해본 바로 우리가 잘 몰랐던 과거 대영제국에 대한 영국의 대내적 입장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었다. 영국의 해양도시 리버풀 앨버트 독에 있는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 위층에는 국제노예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1994년 세계 최초의 노예박물관을 개관한 것이다. 노예박물관에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파헤치고 이 역사에 대한 반성을 깊이 표현하고 있다. 사실 노예무역은 영국의 입장에서 자국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는 치부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여 반성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었다. 리버풀 국제 노역 박물관뿐만이 아니라 우리 일정에 있던 영국 해양 박물관을 가는 곳마다 노예 박물관의 자리를 마련하여 전시하고 반성의 뜻을 알리고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과거의 식민지국가들이 현대에 와서 300여년 만에 노예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법정투쟁을 벌이기로 결정을 할 만큼 많음 반발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관련 피해국들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노예무역과 관련한 유럽 국가들은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외면을 해온 역사 또한 길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최초로 노예 박물관을 개관하여 반성의 뜻을 보였다는 부분이 굉장히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반성을 하고 사과의 입장을 나타낸다 하여도 과거의 참혹한 역사와 그들의 그릇된 행위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국의 과오를 인정하여 담담히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태도는 앞으로 나아갈 또 다른 역사를 쓰는 것과 같다. 비록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하여도 그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끊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국의 명성에 해가 되고 큰 오점을 남긴다 하더라도 풀리지 않는 과거 식민국들과의 대외관계에서 뉘우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또 다른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로 또 다른 미래가 열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고 오히려 그 태도가 먼 훗날 영국이 모두에게 인정받는, 차원이 다른 세계 강대국으로 가게 하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과연 잘못에 대한 반성의 용기가 결코 흠으로 남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탐방을 통해 과연 영국의 과거 해양 강대국다운 면모를 현재에까지도 남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박물관에 전시된 선박과 해양무기 등의 자세한 소개와 항구도시를 직접 다니면서 영국의 해양역사의 위엄 또한 더 실재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이처럼 답사를 통하여 역사의 이면까지 새로이 알 수 있는 점과 책을 통해 보는 것보다 잠시나마 과거로 돌아가 그 속에 머무르며 역사를 체험하는 것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박물관과 역사 속 장소에서 주는 그 감동과 슬픔은 탐방자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게 하였다. 이번 탐방의 여정은 영국의 선진문물과 뛰어난 해양문명을 배우고 받아들이고자 움직인 이와쿠라 사절단의 동선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은 감명까지 재현한 현대판 사절단이었다. 본론에서 언급한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의 보고서를 작성한『실기』의 저자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동양의 옛말을 떠올린다. 말 그대로 눈으로 배우고 느낀 것은 귀로 듣고 느낀 것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다고 하였다. 이 말이 이제야 비로소 어떤 의미인지 백 번 이해가 간다. 가보지 않은 채 논한다는 것은 동전의 앞면만 보는 것과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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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학회(2014), 「통상조약에 나타난 해양관련 조항과 해금(海禁)의 해체 - 제 1, 2차 아 편전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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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문환(2004), 「18세기 설탕산업, 노예무역 그리고 영국 자본주의」, pp. 37-42, pp. 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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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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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문환(2004), 「18세기 설탕산업, 노예무역 그리고 영국 자본주의」, pp. 37-42, pp. 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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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티스
  • 소속 : 국제지역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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