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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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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바다, 구룡포
포항 구룡포조용한 어촌마을 풍경과 함께 볼거리 먹을거리가 가득한 포항 구룡포는 흔히 특산품인 과메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구룡포에서는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근대까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국내조사 중 들렸던 최근 떠오르고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와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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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호랑이 꼬리 부근에 위치한 포항 구룡포는 흔히 특산품인 과메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뿐 아니라 구룡포는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근대까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국내조사 중 들렸던 최근 주목 받고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와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구룡포의 유래와 전설
먼저 구룡포 지명에 관한 전설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마을들을 순사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였다고 한다. 갑자기 바다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며 거대한 용 열 마리가 하늘로 오르기 시작하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떨어졌다. 그러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다. 이후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이 곳을 구룡포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용두산 아래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 안에 아홉 마리 용이 동해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구룡의 흔적으로 호미곶면 대동배에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구룡소가 있다. 구룡소는 높이 40~50m 정도, 둘레 100여m 정도의 움푹 패어있는 기암절벽이다. 용이 살았다는 소는 맑은 바닷물이 드나든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할 때 뚫어진 9개의 굴이 있으며, 파도가 칠 때 입구에 흰 거품과 바닷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마치 용이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모양새라고 한다. 물을 뿜어낼 때 우렁찬 울림소리 또한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아 지금도 구룡소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입구
추억상회
위처럼 적산가옥을 복원한 경우 과거 어떤 형태의, 어떤 건물이었는지 안내되어 있다.
일본 가가와현(香川県)의 어부들이 처음 한반도 해역에 나타난 것은 1880년대 초반이다. 당시 가가와현의 세토내해는 어장이 좁아 어부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힘없던 어선들은 물고기 떼를 좇아 먼 바다로 나섰으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헌상 구룡포 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일본인은 가가와현에서 온 선어운반업자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이다. 그는 1909년에 매제와 함께 구룡포로 이주하여 4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선어운반업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이후 일본인 이주민이 더 증가하게 되면서 일본인 이주어촌의 모습을 갖추고 구룡포는 지역행정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구룡포에는 과반을 차지하며 하시모토를 필두로 한 가가와현 세력 말고, 오카야마현(岡山県) 출신의 도가와 야스브로(十河彌三郞) 중심의 타 지역 세력도 있었는데 두 세력끼리 자주 충돌하곤 했다. 그러다 중심 어항으로 성장해온 구룡포 지역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방파제 건립 사업에서는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구룡포 일본인들은 1923년에 ‘구룡포축항기성동맹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은 도가와가, 부회장은 하시모토가 맡았다. 1926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현대식 방파제가 완공됐다. 이로써 구룡포는 동해안 최대의 어업기지가 됐으며 수많은 일본인 어부가 정착했다. 1932년 구룡포 거주 일본인은 287가구 1,161명에 이르렀다.
이후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남겨진 일본인 가옥거리는 방치와 애증의 시대를 거쳤다. 2000년을 전후해 국가적으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지역에서는 관광사업과 과거 구룡포에서 살았던 일본인들과의 교류가 증대되며 일본인 적산가옥에 대한 새로운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2012년 구룡포 근대역사관을 개관하며 현재는 500여 m 거리에 50여 채 일본식 목조건물이 남아 있다.
구룡포 근대역사관(하시모토 젠기치 가옥)
공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 측면
과메기
과메기는 겨울철에 청어나 꽁치를 얼렸다, 녹였다 반복하며 그늘에서 건조시킨 것으로 포항 구룡포, 영덕 등 동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겨울철 별미이다. 특히 구룡포가 생산지로서 유명하다. 과메기의 어원은 청어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렸다는 관목청어에서 유래되었다. 포항(영일만)지역에서는 목(目)을 매기 혹은 미기로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관매기로 변하고, 다시 ‘ㄴ’이 탈락하면서 과메기가 되었다고 한다.
청어는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잡혔고, 조선 삼면의 바다에서 모두 잡혔던 유일한 어종이었기에 일제강점기까지도 조기, 명태와 함께 조선인이 가장 즐겨먹던 생선 중 하나였다. 이에 청어를 보존해 오래 먹기 위한 방편으로 관목과 같은 건조법이 고안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청어는 사실 조선시대 서해, 남해, 동해의 어획시기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잡혔던 청어의 형태와 맛이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났다고 한다.
1870년대부터 서해에서 청어 어획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주요산지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시기가 되면 동해안 일대에서 청어가 집중적으로 생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일만은 청어가 산란하기에 가장 적합하여 조선 제일의 청어 산란지이자, 청어 산지였다. 또 구룡포는 추운 겨울에 청어가 잡혔기 때문에 청어를 건조하는 데 유리한 환경이기도 했다. 따뜻한 기온에 잡히는 지역보다 부패할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부한 재료와 적합한 어획시기를 갖는 지리적 이점으로 구룡포가 과메기의 고장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부터 영일만에서조차 청어가 거의 잡히지 않고, 1960년대부터 구룡포에서는 청어와 비슷한 영양성분을 가진 꽁치로 대신 과메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꽁치가 대량으로 잡혔으며 적당히 기름기가 있는 등 푸른 생선으로 청어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포항 구룡포 지역에서는 대부분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고 있으며, 기온이 떨어지는 11월부터 2월까지 해안가 일대에서 만들고 있다.
또한 1970년대부터는 통째로 건조시키는 전통적인 ‘통마리’ 제조방법에서 배를 가른 뒤 뼈와 내장을 제거하고 말리는 방식으로 가공법이 바꼈다. 통마리 방식은 건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건조 과정에서 상할 위험이 있었다. 소비자도 손질하는데 번거로우며 냄새가 강하기 때문에 대중화되는데 지장이 있었다. 현재 주로 사용하는 ‘배지기’ 방식은 건조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며 냄새를 약화시킴으로써 과메기가 대중화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포항 구룡포의 특산품 과메기와 문화관, 그리고 최근 주목 받고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두 가까이에 위치해 포항에 들린다면 한 번 가볼만한 곳들이다. 특산품인 과메기로 문화관을 조성했는데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던 점이 인상 깊었다. 일본인 가옥거리도 가옥을 개조해 카페, 분식집 등 상가로 쓰는 점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 같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일본인 가옥거리에서 오랜 시간 긴 줄을 서서 사진 찍는 관광객들을 보면 이곳의 역사적 의미는 알고 왔을까 생각될 정도로 일반 드라마 세트장이나 관광지에 온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근대역사관은 일본의 가난했던 한 어부의 부의 축적과 성공한 이야기 또 일본인 생활상에 온전히 집중하고, 일제의 침략과 조선 어민들의 수탈에 관한 이야기는 제대로 비춰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고 앞으로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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