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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바다, 구룡포

포항 구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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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117번길 28-8(포항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
  • 키워드
    포항, 구룡포, 포항 일본인 가옥거리, 포항 근대문화역사거리, 과메기 문화관

조용한 어촌마을 풍경과 함께 볼거리 먹을거리가 가득한 포항 구룡포는 흔히 특산품인 과메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구룡포에서는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근대까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국내조사 중 들렸던 최근 떠오르고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와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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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호랑이 꼬리 부근에 위치한 포항 구룡포는 흔히 특산품인 과메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뿐 아니라 구룡포는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근대까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국내조사 중 들렸던 최근 주목 받고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와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구룡포의 유래와 전설

먼저 구룡포 지명에 관한 전설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마을들을 순사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였다고 한다. 갑자기 바다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며 거대한 용 열 마리가 하늘로 오르기 시작하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떨어졌다. 그러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다. 이후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이 곳을 구룡포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용두산 아래 깊은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 안에 아홉 마리 용이 동해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구룡의 흔적으로 호미곶면 대동배에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구룡소가 있다. 구룡소는 높이 40~50m 정도, 둘레 100여m 정도의 움푹 패어있는 기암절벽이다. 용이 살았다는 소는 맑은 바닷물이 드나든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할 때 뚫어진 9개의 굴이 있으며, 파도가 칠 때 입구에 흰 거품과 바닷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마치 용이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모양새라고 한다. 물을 뿜어낼 때 우렁찬 울림소리 또한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아 지금도 구룡소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입구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입구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구룡포에 가면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살았던 가옥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일본인 가옥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1990년대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였고, 최근에는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로 주목 받고 있다. 드라마의 주요 배경이 되던 건물들은 모두 긴 줄을 서야만 사진 촬영이 가능했다. 2020년의 무더운 여름 코로나 사태에 마스크로 무장한 관광객들이 드라마 여운을 따라 이곳을 찾은 것처럼, 100년 전 오늘 구룡포 거리는 식민지 땅의 유토피아를 찾은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구룡포는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는데, 일본인들이 모인 일제강점기 시기 이곳은 최적의 어업기지로 떠올랐다. 전성기 구룡포 앞바다의 어획량이 참으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바다를 한 번 나갔다 오면 배 세 척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한다. 고기가 풍부하니 돈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선박경영과 선박운반업, 통조림 가공공장 등으로 부유해진 일본인들은 집을 지었고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다. 술집, 여관, 음식점, 제과점, 백화점 등이 들어선 거리는 날로 번창했으며 구룡포 최대 번화가로 성장했다.
개항 이후 일본 어민들이 조선해역에서 어로활동을 전개하고 이주어촌을 형성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일련의 강압적인 조약 체결의 결과였다. 일본은 조선과 조일통상장정(1883)과 조일통어장정(1889)을 체결하며 조선해역에 대한 통어를 완전히 합법화하였다. 이에 따라 20세기에 접어들며 이주어촌을 건설하며 정착어업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인 이주어업이 성행했던 어촌지역은 근대적 시설을 갖춘 어항을 중심으로 소도시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구룡포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동해안을 대표하는 어항이 된 것이다.
추억상회

추억상회

위처럼 적산가옥을 복원한 경우 과거 어떤 형태의, 어떤 건물이었는지 안내되어 있다.

위처럼 적산가옥을 복원한 경우 과거 어떤 형태의, 어떤 건물이었는지 안내되어 있다.

일본 가가와현(香川県)의 어부들이 처음 한반도 해역에 나타난 것은 1880년대 초반이다. 당시 가가와현의 세토내해는 어장이 좁아 어부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힘없던 어선들은 물고기 떼를 좇아 먼 바다로 나섰으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헌상 구룡포 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일본인은 가가와현에서 온 선어운반업자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이다. 그는 1909년에 매제와 함께 구룡포로 이주하여 4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선어운반업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이후 일본인 이주민이 더 증가하게 되면서 일본인 이주어촌의 모습을 갖추고 구룡포는 지역행정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구룡포에는 과반을 차지하며 하시모토를 필두로 한 가가와현 세력 말고, 오카야마현(岡山県) 출신의 도가와 야스브로(十河彌三郞) 중심의 타 지역 세력도 있었는데 두 세력끼리 자주 충돌하곤 했다. 그러다 중심 어항으로 성장해온 구룡포 지역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방파제 건립 사업에서는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구룡포 일본인들은 1923년에 ‘구룡포축항기성동맹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은 도가와가, 부회장은 하시모토가 맡았다. 1926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현대식 방파제가 완공됐다. 이로써 구룡포는 동해안 최대의 어업기지가 됐으며 수많은 일본인 어부가 정착했다. 1932년 구룡포 거주 일본인은 287가구 1,161명에 이르렀다.
이후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남겨진 일본인 가옥거리는 방치와 애증의 시대를 거쳤다. 2000년을 전후해 국가적으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지역에서는 관광사업과 과거 구룡포에서 살았던 일본인들과의 교류가 증대되며 일본인 적산가옥에 대한 새로운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2012년 구룡포 근대역사관을 개관하며 현재는 500여 m 거리에 50여 채 일본식 목조건물이 남아 있다.

구룡포 근대역사관(하시모토 젠기치 가옥)

구룡포 근대역사관(하시모토 젠기치 가옥)

구룡포 근대 역사관

아쉽게도 휴관을 하여 내부를 볼 순 없었지만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100년 전, 일본인들의 구룡포 정착 상황과 당시 생활 모습 등을 전시한 곳이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는 전술한 가가와현 출신의 구룡포 어업조합장이었던 하시모토 젠기치가 1920년대에 지은 살림집으로, 일본식 건물의 특징을 잘 갖춘 목조가옥이다. 건물은 그가 집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들여와 건립한 것이다. 하시모토 일가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오랫동안 한국인이 거주하였는데, 2010년 포항시에서 매입하여 복원 공사를 마무리한 뒤 2012년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1층 전시실은 하시모토가 거주하던 안방이다. 부츠단(仏壇)코타츠(炬燵)이로리(囲炉裏) 등 당시 일본주택의 전통적인 가구와 소품들이 재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일본 전통부엌과 화장실도 당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2층 전시실은 하시모토 딸의 방과 손님 접대방 등이 있던 공간으로 란마(欄間)도코바시라(床柱) 등을 볼 수 있다. 창문, 창살들은 다양한 문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만큼 이 집이 부유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공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구룡포 공원

가옥거리 뒤로는 일본인들이 손수 만들었던 공원이 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이 나오는데 돌계단 양쪽으로 비석을 세워놓았다. 기둥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영일군수 김우복, 영일교육감 임종락, 제일제당 구룡포 통조림 공장 하사룡 등을 볼 수 있다. 기둥은 양쪽에 120개가 세워져 있는데 계단 안쪽마다 거리 복원에 기여한 한국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런데 반대편은 시멘트로 발려져 있다. 찾아보니 이 부분은 1920년대 쯤 돌기둥을 만들 때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며 해방 후 한국인들이 돌기둥을 돌려세우고 시멘트를 덮어버린 것이라 한다. 기둥 하나마다 근대 100년사가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공원에는 용왕당, 충혼각과 충혼탑,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등을 볼 수 있다. 용왕당은 구룡포 어민들의 풍어와 안전조업을 기원하기 위한 제당이다. 일반적으로 용왕당에는 여신인 용신할머니, 용궁애기씨, 용왕부인 등을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구룡포의 용왕당은 남신인 '사해용왕'을 모시는 것이 특징이다. 용왕당 건물은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정착하며 건립했던 신사를 철거하고 1956년 건립하였다. 이후 건물이 노후하여 2008년 새롭게 한옥 건물로 신축하였다.
이곳 충혼탑은 6.25 전쟁 등에서 순국한 포항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0년 건립하였다. 당시 열악한 재정상황 문제로 탑신의 받침대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설치한 구조물 위에 충혼탑이 설치되어 있다가 2007년 9월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재건립되었다. 그리고 공원 내에 충혼탑과 충혼각 외에도 학도의용군들의 유품을 전시한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과 포항지구 전적비도 자리 잡고 있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는 일본인 도가와 야스브로를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이다. 도가와 야스브로는 전술했듯 일제강점기에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 등에 관여한 사람으로, 일본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해방 전인 1944년 경에 송덕비를 세운 것이라 한다. 하지만 송덕비는 패전 이후 일본인들이 돌아가고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하여 현재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다.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 측면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 측면

구룡포 과메기문화관

일본인 가옥거리에서 구룡포 공원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을 갈 수 있다. 구룡포 지역 일대가 2007년 과메기특구지구로 지정되면서 2017년에 정식 개관한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은 포항의 대표적인 특산품 과메기의 체계적인 연구와 품질관리 및 홍보를 위하여 건립되었다. 내부는 과메기 연구센터와 홍보관, 문화관, 영상관, 어촌체험시설과 해양생태관 등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과메기 판매장, 카페, 도서관까지 갖추고 있다. 높이 위치한 시설은 한적한 해안마을과 구룡포 앞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도 있다.
과메기 홍보관과 문화관에서는 과메기의 어원 및 유래와 문헌상 기록, 영양성분, 과메기 산업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70년대 과메기 주점과 같은 시기의 어촌 가옥을 재현하고 있으며, 당대 어업인으로서 최고의 부자가 된 전진곤씨의 목선 유명호를 축소 전시하고 있다. 체험 콘텐츠가 정말 다양했기 때문에 남녀노소 즐길 수 있고, 특히 청소년들에게 즐겁고 유익한 문화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옆에 함께 있는 복합문화공간인 아라예술촌도 구룡포의 특별한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한 생활문화 거점시설로서 지역 내 젊은이들을 모으고 활력을 불어다 줄 것이다.

과메기
과메기는 겨울철에 청어나 꽁치를 얼렸다, 녹였다 반복하며 그늘에서 건조시킨 것으로 포항 구룡포, 영덕 등 동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겨울철 별미이다. 특히 구룡포가 생산지로서 유명하다. 과메기의 어원은 청어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렸다는 관목청어에서 유래되었다. 포항(영일만)지역에서는 목(目)을 매기 혹은 미기로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관매기로 변하고, 다시 ‘ㄴ’이 탈락하면서 과메기가 되었다고 한다.
청어는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잡혔고, 조선 삼면의 바다에서 모두 잡혔던 유일한 어종이었기에 일제강점기까지도 조기, 명태와 함께 조선인이 가장 즐겨먹던 생선 중 하나였다. 이에 청어를 보존해 오래 먹기 위한 방편으로 관목과 같은 건조법이 고안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청어는 사실 조선시대 서해, 남해, 동해의 어획시기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잡혔던 청어의 형태와 맛이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났다고 한다.
1870년대부터 서해에서 청어 어획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주요산지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시기가 되면 동해안 일대에서 청어가 집중적으로 생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일만은 청어가 산란하기에 가장 적합하여 조선 제일의 청어 산란지이자, 청어 산지였다. 또 구룡포는 추운 겨울에 청어가 잡혔기 때문에 청어를 건조하는 데 유리한 환경이기도 했다. 따뜻한 기온에 잡히는 지역보다 부패할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부한 재료와 적합한 어획시기를 갖는 지리적 이점으로 구룡포가 과메기의 고장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부터 영일만에서조차 청어가 거의 잡히지 않고, 1960년대부터 구룡포에서는 청어와 비슷한 영양성분을 가진 꽁치로 대신 과메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꽁치가 대량으로 잡혔으며 적당히 기름기가 있는 등 푸른 생선으로 청어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포항 구룡포 지역에서는 대부분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고 있으며, 기온이 떨어지는 11월부터 2월까지 해안가 일대에서 만들고 있다.
또한 1970년대부터는 통째로 건조시키는 전통적인 ‘통마리’ 제조방법에서 배를 가른 뒤 뼈와 내장을 제거하고 말리는 방식으로 가공법이 바꼈다. 통마리 방식은 건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건조 과정에서 상할 위험이 있었다. 소비자도 손질하는데 번거로우며 냄새가 강하기 때문에 대중화되는데 지장이 있었다. 현재 주로 사용하는 ‘배지기’ 방식은 건조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며 냄새를 약화시킴으로써 과메기가 대중화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포항 구룡포의 특산품 과메기와 문화관, 그리고 최근 주목 받고 있는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두 가까이에 위치해 포항에 들린다면 한 번 가볼만한 곳들이다. 특산품인 과메기로 문화관을 조성했는데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던 점이 인상 깊었다. 일본인 가옥거리도 가옥을 개조해 카페, 분식집 등 상가로 쓰는 점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 같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일본인 가옥거리에서 오랜 시간 긴 줄을 서서 사진 찍는 관광객들을 보면 이곳의 역사적 의미는 알고 왔을까 생각될 정도로 일반 드라마 세트장이나 관광지에 온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근대역사관은 일본의 가난했던 한 어부의 부의 축적과 성공한 이야기 또 일본인 생활상에 온전히 집중하고, 일제의 침략과 조선 어민들의 수탈에 관한 이야기는 제대로 비춰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고 앞으로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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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대화, 「‘구룡포 과메기’의 역사문화적 변천-재료와 제조법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57, 한국역사민속학회, 2019.
-이창언, 「식민지시기 구룡포지역의 일본인 사회」, 『민속학연구』, 27, 국립민속박물관, 2010.
-박관영, “[스토리의 寶庫 영일만을 가다] 6. 구룡포 적산가옥과 일본인 어부”, 영남일보, 2013년 8월 1일자.
-정태현, “구룡표 100년”, 경북일보, 2013년 4월 15일자.
-포항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s://blog.naver.com/fulsa/221310416113
-구룡포 과메기 문화관 홈페이지 http://gmg.pohang.go.kr/gwamegi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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