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양도시문화탐방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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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을 따라서
하동 섬진나루섬진강 수로는 남해안과 호남을 연결해주는 대표적인 수로이다. 섬진나루를 통해서 산간지역의 물품이 여수, 광양으로, 여수의 국산 뿐만 아니라 외국산 물품이 호남으로 유입되었다.
현재 섬진나루는 터만 남아 이전과 같이 활발히 운용되는 수로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지만 섬진강을 따라 섬진나루터를 방문함으로써 당시 수로를 이용해 인적, 물적 교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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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진강과 해양력
한반도는 70%가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물류의 이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들의 이동이나 화물의 운송에 있어서 연안 해로나 하천 수로를 이용했다. 또한 수로는 내륙의 주요한 거점지역을 연결하고 바다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해양력1)과 연결된다.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에 솟아있는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경상도·전라도의 도계(道界)를 이루면서 광양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섬진강 유역에는 그물망처럼 잘 갖춰진 내륙 교통로가 존재했고 교류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한 섬진강 하구와 가까운 광양만이 속한 서남해안은 중국대륙, 한반도 그리고 왜를 연결해주는 동북아 해상 교통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섬진강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2. 섬진강 대외교류
선사시대 이래 교통로는 정치적·군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도시와 도시사이, 도시 내 주요 도로를 오가며 사람을 태워 나르거나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경제적 의미를 포함한다. 섬진강은 시대별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 왔을까? 다양한 자료에 섬진강의 기록이 남아있다.
(2-1) 가야와 섬진강
‘ 가라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 국왕 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는데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서 〔조정〕에 올라오니 멀리 있는 夷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랴.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의 관작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2)
479년 가야왕 하지가 남제로부터 “輔國將軍 本國王” 대중교섭을 전개할 때 이용했던 교통로는 고령 → 거창 → 함양 → 남원 → 섬진강 → 하동을 거쳐 바다로 나가 서남해안을 따라 남중국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의 한 종족인 가라국이 남제에게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가야가 대표적인 가야 지배 정치체임을 과시하고 한반도의 유력한 정치세력의 하나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수로가 군사적 형태가 아닌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이다.
(2-2) 백제와 섬진강
한성기 백제의 간선 교통로는 한성 → 광주 → 이천 → 진안 → 섬진강 유역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4세기 후반 이후 교통 분기점과 전략상 요충지에 토성과 산성을 축조했는데, 이는 주로 섬진강 상류와 중류에서 발견된다. 이는 섬진강이 백제에게 중요한 교통로임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웅진으로 천도하고 세력이 약해진 시기를 틈타 가야 세력이 장수지역과 운봉지역에서 성장하였다. 가야는 섬진강 유역으로 세력권을 넓혔고 백제는 한성기 간선 교통로를 포기하고 새로운 수도 공주를 중심으로 간선 교통로를 재편성 한다.
그러나 백제의 섬진강 유역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첫째로는 가야 세력을 견제(군사)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대왜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웅진기 백제 무령왕은 대가야를 공격하여 기문(전북 남원)에서 대사(경남하동)에 이르는 섬진강 유역을 영역화 하였다. 대사(하동)의 점유는 백제가 남해안을 통해 대왜 교통로를 장악했음을 뜻한다.
(3) 통일신라서남해안 해상교통로
바다를 통해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연결해주는 서남해지역은 해상교통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산동에서 출발해 대마도에 도착하는 여정을 통해 당시 해상교통로를 확인할 수 있다.
‘산동반도 赤山 莫耶口 출발(847년 9월 2일 정오) →(동행) → 서웅주 서해(9월 4일 새벽) → (동남행) → 高移島(9월 4일 오후 9시경) → 무주 黄茅島〔一云 丘草島〕(9월 6일 오전 6시경) → (동행) → 雁島(9월 8일 오전 9시경) → (동남행) → 對馬(9월 10일 오전) → 九州 肥前國 松浦郡 鹿島(9월 10일 초 저녁)3) 雁島는 여수 남쪽에 위치한 안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섬진강 하구와 수로로 연결된 여수가 서남해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외래문물은 사절단, 구법승, 무역상인 등의 왕래에 의해 반입되었다. 즉, 서남해 교통로는 외래문물의 길이었던 것이다.
3. 섬진강 조운제도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는 육지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방에서 수취한 조세를 효율적으로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전국의 주요 강가를 조운 거점으로 지정하고 조창기구를 설치했다.
(1) 고려의 조창
고려 건국 초 조운제도는 연안 또는 강변에 포를 거점으로 60개의 포를 설치해 세금을 수취했다. 중앙집권의 기틀이 잡히지 않아 지방호족의 협조를 통해 운영되었다. 이와 달리 고려 전기 행정체제의 기틀을 잡고 13조창이 설치되었고, 14세기 군현별 조운방식의 확산으로 변화되었다.
섬진강에 위치했던 조창은 전라남도 순천시의 해룡창(海龍倉)이다. 고려 초기에 설치한 조창 중 하나로 이곳에 위치했던 포구를 조양포라 부른다. 해룡창에 모인 세곡은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고려의 수도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고려사』 정종(1034~1046) 전국 각 조창에 배치할 조운선의 숫자를 정하면서, 해룡창에는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을 두었다고 한다. 해룡창은 순천 동천과 섬진강 권역의 섬진강 남해권 수계에 속해 있는 지방 하천으로, 순천 동천의 지류인 이사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과거 고려시대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지만, 토사의 퇴적이 누적되면서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고려 후기와 맞물리는 1350년대, 일본은 중앙정권 무로마치 막부가 붕괴로 150년간 피 튀기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전쟁자금을 비롯한 물자와 자본이 필요했던 다이묘들의 생계형 해적질이 극성이었다. 이 해적들이 남해안에 침입하자 적군의 식량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남해안의 조창에 변화가 생긴다. 도시와 도시사이, 도시 내 주요 도로를 오가며 사람을 태워 나르거나 화물을 실어나르는 교통운수로 운송이나 운반보다 큰 단위인 조운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전성을 쌓아 자체적으로 조창을 방어하고 남해안 일대의 조창을 폐지한 것이다.
(2) 조선의 조창
조선 전기 조운체계는 고려 말 극성했던 왜구의 영향과 왜구의 침입이 진정된 후에도 세곡의 상당수가 조선 시대에 동래부가 왜관에 주재하는 왜인에게 과해미와 유포미 등으로 일정 부분 지급하던 비용인 왜료로 지출되어 남해안·경상도 지역을 제외하고 운영된다. 이후 18세기 중반 3조창(마산창·가산창·삼랑창)의 설치로 남해안 지역의 조운 제도가 부활한다.
조선정부의 남해안 수군진 설치는 왜구 침입에 대한 군사적 대응이었다. 특히, 섬진진은 수군 통제영이 직접 관할하고 이순신이 군사를 주둔시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을 정도로 중요한 군사적 위상을 지녔다.
섬진강 이름의 유래가 된 두꺼비전설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다. 강 동편에서 왜구들에게 쫓긴 조선 병사들이 섬진나루 건너편에서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는데 두꺼비 떼들이 강물 위로 떠올라 병사들이 건너는 것을 도와주었다. 뒤 쫓아 온 왜구들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강 한가운데에 이르러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왜구들이 모두 빠져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전까지 다사강ㆍ모래내ㆍ두치강 등으로 불리던 이 강은 그 이후로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써서 섬진이라 불리었다.
현재 화개장터
최참판 댁
현재 섬진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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