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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의 단단한 발자취, 수군 통제영
통영 삼도수군통제영통영에 자리 잡은 삼도수군통제영은 조선 시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도의 수군 총사령부이며 조선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장군의 전초기지를 말한다. 통제영은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로서 임명된 후 생긴 수군 기지이며, 그곳을 지휘하던 통제사들의 권위가 강화되기도 했는데 통제영 내의 다양한 건물들로부터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곳을 방문하면 통제영 고유의 건물과 기념물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생활을 엿보고 이충무공과 조선 수군이 살았던 당시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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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일루 (2020년 1월 촬영)
(1-1) 통제영으로 통하는 문, 망일루(望日樓)
수군 통제영은 대표적으로 중심 건물인 세병관(洗兵館)이 가장 눈에 띈다. 하지만 이곳의 웅장함을 맞이하기 전 한 건물을 거쳐서 통제영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통영 수군 통제영의 입구인 망일루(望日樓)이다.
통제영의 안내에 의하면, 망일루(望日樓)는 광해군 3년(1611)에 제10대 통제사였던 우치적이 세웠으며, 영조 45년(1769) 제128대 통제사 이국현이 화재로 손실되었던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곳 망일루는 세병관(洗兵館)으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에 세병문(洗兵門)이라고도 칭했으며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있어 종루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소실되었던 망일루는 2000년에 중건되었다고 쓰여있다.
망일루(望日樓)의 오른쪽에는 수항루(受降樓)와 좌청(左廳)이 위치하며 왼쪽으로는 산성청(山城廳)이 있다. 통제영 설명에 따르면 수항루는 2층 누각으로 통영성 남문 바깥에 있는데, 임진왜란의 승리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숙종 3년(1677) 제58대 통제사인 윤천뢰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수항루는 봄가을에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 받는 행사를 진행해왔다.
(1-2) 통제사들의 생활이 엿보이는 공간들
세병관 뒤쪽으로는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었던 백화당(百和堂),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영역이자 업무를 보는 공간과 살림채가 공존하는 곳인 내아 군(群), 내아 군내에는 통제사가 통제영 군무를 보는 집무실인 운주당(運籌堂), 경무당(景武堂), 살림채인 내아 등이 있다. 특히 경무당은 충무공 이순신의 뜻을 크게 우러러본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통제사 중에서도 참모장급의 우후가 생활하던 숙소인 결승당(決勝堂), 중영 안의 영빈관으로 ‘응수전’ 이라고도 부르던 응수헌(應酬軒), 통제사 우후의 군영으로 ‘우후영’이라고도 하며 2011년 중건된 중영청(中營廳) 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
세병관 정면 모습(2020년 8월 촬영)
(2-1) 통제영을 대표하는 건물, 세병관(洗兵館)의 가치
세병관(洗兵館)은 ‘은하수 빛으로 병기를 씻음’을 의미하는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여기서 병기를 씻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로 생각될 수 있을까? 병기는 전쟁 중 사용한 무기 등의 것들을 말하는데, 이것을 씻어냄으로써 전쟁의 끝맺음과 평화를 염원한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병관은 충무공 이순신의 단단한 기상을 느낄 수 있는 조선 수군 전초기지일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고통을 중단할 상징적인 평화의 공간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통영 세병관(洗兵館)은 당시 건물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어 그 가치를 더욱 인정하여 보물 제293호에서 국보 30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곳은 본래 이순신 장군의 전쟁 중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후일에 ‘삼도수군통제사영’의 건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세병관은 창건 후 3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이나 통제영의 중심 장소로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통영 수군 통제영에서도 세병관을 유심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병관에서 바라본 전망 (2020년 8월 촬영)
세병관에서 바라본 세병관 입구 (2020년 1월 촬영)
1963년 건물 수리 시 발견된 ‘세병관 중수상량문’에 의하면 세병관은 을사년(1605) 1월에 짓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 7월 14일에,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올려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병관은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남해를 바라보는 모습이 여전히 위엄있게 느껴진다. 또한 세병관은 직사각형 평면형식을 고수하여 모든 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전체구조를 연결하여 하나의 공간으로 개방한 것이 특징적인데, 이러한 축조 방식 덕분인지 비가 내리는 날 방문하여도 더욱 운치 있고 건물이 주는 엄숙한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은 국보 제304호인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위치의 여수 진남관과 국보 제224호인 서울 종로구 경복궁 경회루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에 포함되며 모두 17세기 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충무공의 단단한 절개가 살아있는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의 발자취가 돋보이는 장소로 그 역사성이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이뿐만 아니라 세병관은 건물 구성이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가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건물의 정교함과 고유의 화려한 문양을 보아 예술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2 공방을 복원한 곳의 석수조(2020년 1월 촬영)
통제사 비군(群) (2020년 1월 촬영)
(3-1) 통제영과 떨어질 수 없는 곳, 12 공방
통제영 내에서 살펴볼 또 다른 건물은 ‘12 공방’이다. 공방은 제반 군기와 진상품 등을 생산하던 곳으로, 통제영 공방은 ‘많은’이라는 뜻을 가진 숫자 ‘12’를 사용해 ‘12 공방’이라 불렸다. 공방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진영을 꾸렸을 때부터 통제영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 공방은 이충무공이 임진왜란 초기 변방에서 각종 군수품을 자체 조달목적으로 한산 진영에서 시작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생활용품도 다양하게 생산했다고 한다.
통제영은 중앙에서 군수물자를 보급받기 어려워 각종 물자를 자체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통제영 내에는 통제영에서 필요한 각종 물건을 제작하는 공방이 함께 존재했다. 그러므로 통제영 공방은 통제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관청수공업’에 속했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관청수공업인 공방은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전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지방의 통제영 공방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지속해서 발전하게 된다. 통제사가 가진 강력한 경제권이 바탕이 되어 그들의 재정적인 부분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생산품을 장인들이 판매할 수 있게 운영하여 생산성도 높였던 것이 그 이유이다. 통제영 공방은 1850년에 이르러 장인의 수와 공방 건물들이 많이 증가하며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점점 물품의 수요가 늘어나자 생산력이 떨어졌으나 공방은 협업적 분업화를 통해 전문기술을 다루는 공방의 수를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생산력을 증대시키며 더욱 발달시켰다. 이러한 과정으로 통제영 공방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전국을 넘어서서 18세기에 이르면서는 중국에 수출될 정도의 품질을 자랑했다.
(3-2) 통제사비군(群)에서 역대 통제사들을 기억하다.
통제영에는 당시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통제사 비 군이 있다. 통제사비군(統制使碑群)은 역대 통제사들의 비석들이 시내에 여럿 흩어져 있던 것을 통제영 내로 모아 동쪽을 향하도록 하여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놓은 것이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였다가 임기를 끝내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의 군(軍)·관(官)·민(民)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頌德碑)인데, 그 표제(標題)는 다양하게 있다. 또한, 비석을 보면 조금씩 인위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생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사실은 훼손된 부분은 비(碑)를 세웠을 당시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념하는 비석의 내용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화난 백성들이 낸 흔적이라고 한다.
관람용 조선 수군 복장 (2020년 1월 촬영)
5. 아직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동안 통제영을 알지 못했거나 혹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나 유적지의 개념으로만 생각했을지 몰라도 윗글로서 이곳의 역사적 의의가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제 이곳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은 함께 혹은 혼자 이곳에 방문한다면 위의 내용을 모르고 방문하였을 때보다 더욱 흥미롭고 인상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우리는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을 방문함으로써, 그를 시기하던 당파와 관리들로 인해 하옥 생활을 겪었지만 이내 상황을 극복하고 목숨 바쳐 끝까지 전투에 임한 이충무공의 단단하고 곧은 절개와 굳건한 마음에 공감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자. 그 역시 전쟁과 죽음이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지만, 그는 끝내 전쟁의 승리로서 두려운 마음만큼 용기를 가지고 맞서 싸웠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해주신 이순신 장군과 그의 수군 기지인 통제영을 잘 알고, 조선 수군의 기상을 느끼며 그들을 기억하고 돌아간다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으로 보답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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