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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보물창고,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박물관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다양한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곳의 유물들은 나폴레옹 시기, 그리고 제국주의 시기 약탈 등의 과정을 통해 들여온 유물들이라는 점에서 루브르 박물관은 제국주의로 성장하는 프랑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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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1989년, 한 미국인 건축가에 의해 나폴레옹 안뜰에 투명한 피라미드 건물이 세워졌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건물은 ‘루브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곳의 유물들은 나폴레옹 시기, 그리고 제국주의 시기 약탈 등의 과정을 통해 들여온 유물들이라는 점에서 루브르 박물관은 제국주의로 성장하는 프랑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 로비
한국어가 적혀있었다.
근대에 들어서 제국주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하더라도, 그들이 정복했던 혹은 발굴하러 다녀갔던 지역들은 한 때 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곳이었다. 두 강 사이에서 정착을 시작했던 메소포타미아가 그렇고, ‘나일 강의 축복’을 받은 이집트가 그렇다. 이 두 곳은 세계 4대 문명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동시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외 무역을 전개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성을 가진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사이,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이곳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마을을 형성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도시가 생기고 권력자가 등장하며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4,000년 이후인데 이렇게 그들이 문명을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옥한 토지와 함께 지중해 주변의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세력이 그들과 가까운 바다인 지중해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9세기 중엽부터이다. 특히 아시리아 제국 당시에는 지중해의 경제·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고 속국으로 만들어 제국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자원을 공급받았다. 1)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중해의 중요한 항구를 정복하고 자원을 공급하여 경제활동의 중심지로 키워나갔으며, 페니키아에 무역 중개소를 설치하여 지중해를 통한 무역에 전념하였다.
문화적으로도 지중해는 그들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중해 주변에서 자라는 백향목은 전통적으로 신전을 지을 때 사용하는 소재였다. 티글랏빌레셋 1세의 기록에는 신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백향목을 베어 앗수르로 가져왔다고 기록한다.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 그들은 백향목을 강과 지중해 그리고 수운을 이용하여 그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지역으로 백향목을 옮겼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2)
한편 이집트 문명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 강과 그로 인해 형성된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이집트는 둑을 세우고 수로를 만들었으며, 도시를 이루었다. 타 국가와의 무역도 활발하게 진행했는데, 나일 강 운행에 필요한 대형 선박의 건조를 위해 일찍부터 페키니아의 비블로스 항구를 통하여 백향목을 수입3)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또한 이집트는 선박을 타고 크레타와 교역하기도 했는데, 고대 이집트의 항해기술을 고려해보면 연안을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다.
3. 문명, 박물관에서 잠들다
강을 중심으로, 그리고 지중해를 통한 무역으로 성장한 두 문명의 흔적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프랑스에 의해서 발굴되고 또 전시되었다. 이러한 발굴·연구 행위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근세 시기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경제적·문화적·과학적 발전 때문이었다.
이집트 문명의 흔적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은 프랑스인들의 여행 혹은 고고학 탐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19세기 이후 멤피스 세라피움 신전에서 마리에트가 발견한 산물인 약 6천개의 이집트 유물이 루브르에 들어오게 된다. 특히 1880년 카이로에 동양 고고학 프랑스 협회를 창설하여 많은 유적들과 유물들을 발굴해내는 성과를 이루었다.4)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세계 1차 대전 이후, 1929년부터 끌로드 세페르(Claude Schaeffer)에 의해 구 우가트리인 라스 솨마라(Ras Shamara)가 발견되고, 앙트레 파로(Andre Parrot)는 1933년 고대 마리 왕국을 발견했다. 5) 이후에는 지중해 지역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 지역의 유물에도 손을 뻗기 시작한다.
프랑스가 이렇게 나아 갈 수 있었던 데에는 전술한 경제적·문화적 발전과 더불어 해양 진출 정책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16세기, 비록 100년 전쟁등과 같은 혼란으로 주변 국가보다 한 발 늦었지만, 프랑수아 1세 재위 후 브로타뉴와 노르망디 지역을 되찾으면서 단숨에 아시아의 수마트라까지 이를 수 있었다. 17세기부터는 리슐리외에 의해 상비 해군을 양성하고 항구를 근대화시킴으로써 본격적인 해양 진출 정책을 펼쳤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해상 교역 루트를 확보하면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잠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다시 회복하여 19세기 중반에는 최초의 중장갑함 함대를 맞추는 등 강한 해군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하였다.
4. 맺음말
기술적인 성장과 부의 축적은 자국 내에서 다양한 연구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또한 국력 증강을 통한 식민지 지배는 해당 지역을 연구하고 또 식민지 지역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활발히 여행을 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 즉 그들이 발견해낸 문명의 흔적은 박물관에 잠들어 우리에게 당시의 현장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유물 중에는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 등으로 약탈된 유물들도 존재하고 있으며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 지역에서 발굴하여 전시된 유물들도 다수이므로, 이렇게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과연 도의적으로 옳은 일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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