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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메, 오리엔탈리즘을 알리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 탐방일시 :2020.01.03 ~ 2020.01.03
  • 조회수 :446
  • 좋아요 :0
  • 위치
    6 Place d'Iéna, 75116 Paris6 Place d'Iéna, 75116 Paris
  • 키워드
    파리, 기메, 동양, 오리엔트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은 사업가이자 동양유물수집가인 에밀 기메(Emile Guimet)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 리옹에서 설립된 박물관은 파리로 옮겨지게 되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주목하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을 소개하고 기틀을 잡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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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은 사업가이자 동양유물수집가인 에밀 기메(Emile Guimet)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 리옹에서 설립된 박물관은 파리로 옮겨지게 되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주목하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을 소개하고 기틀을 잡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이곳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각지의 유물들이 각 전시실 별로 구성되어 있다. 본 글에서는 프랑스의 동아시아 진출 과정을 살펴보고, 기메동양박물관에 전시된 한국 유물들과 이를 기증한 샤를 바라를 중심으로 여행기에서 드러나는 제국주의적 시선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2. 프랑스의 동아시아 진출과 샤를 바라의 조선 여행

19세기 후반부터 ‘철강의 시대’가 전개되면서 구경 수십센티미터의 대형 포탑을 장착한 전함이 출현했다. 프랑스 혁명이후 잠시 주춤하다가 주앵빌 왕자의 역할로 어느정도 힘을 회복한 프랑스 해군은 나폴레옹 3세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 프랑스 해군을 당할 수 없어 보일 만큼 크게 발전했다.1)

나폴레옹 3세가 퇴진할 무렵에는 그가 세우고 추진한 해군 정책의 전체 틀을 유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공세적인 해양 팽창 정책을 취하려고 하였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작전을 유지해야 했던 데에는 첫 번째,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의한 프랑스 고립 작전으로 인해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프랑스인 기술자에 의한 혁명적인 조선기술의 발달 때문이었다.2)

이러한 해양력을 바탕으로 프랑스가 조선에 도달한 것은 개항기를 전후한 시기지만, 한국의 민속품을 수집한 것은 1886년의 조불통상수호조약이 계기가 되어 실행되었다. 1887년 프랑스 외교관인 콜랭 드 프랑시는 13년간 조선에 근무하면서 스스로 조선 민속품을 수집함을 물론, 프랑스에서 파견된 탐사자 샤를 바라(Charles Varat)의 조선 민속품 수집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샤를 바라의 한국 탐사는 프랑스의 문교부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언어적인 문제는 프랑스어를 배우던 몇몇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약 6주 동안 제물포-한양-부산에서 수많은 민속품을 수집할 수 있었으며, 이렇게 수집된 민속품을 바탕으로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만국박람회에 조선의 민속품이 최초로 소개되었다. 이후 샤를 바라의 소장품은 그가 국가에 기증하면서 프랑스 국립 민족학 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상설 전시되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극동아시아’국가들의 유물들은 인류학 혹은 민족학적 가치와 미술사적 가치를 구분하기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민족학 박물관 측은 기메 박물관으로 유물들을 이전하길 원했고, 결국 민족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한국 유물들은 1891년 다른 동아시아 유물들과 함께 기메 박물관으로 옮겨졌다.3)

3. 제국의 시선

6주 동안 한국을 횡단한 샤를 바라는 민속품만 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겪은 모든 것을 ‘여행기’의 형식으로 기록했다. 그 여행기는 『조선기행(Deux voyages en Coree)』(1892)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남아있다.
이 여행기는 틈틈이 한국의 자연경관에 대한 감탄과 경외로 시작하여 그가 관찰한 사람, 습관 등에 서양의 문명화, 규정화된 개념을 적용하여 해석하는 방향으로 저술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3) 가령 샤를 바라의 『조선 기행』에는 계란과 관련된 일화가 등장한다. 샤를 바라가 삶은 계란 하나를 받았는데 삶은 계란용 그릇이 없어서 알 한쪽을 살짝 깨트려 탁자 위에 세워두었더니 조선 사람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식, 혹은 일본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두 개의 나무젓가락보다 청결함이나 편리함에서 이 기묘한 도구가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느끼는 듯했다.”4)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즉,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어떤 것 보다 서양의 문명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는 문장은 마치 저들의 문화는 자신들의 것인 서양의 문명보다 뒤떨어지는, 오히려 자신의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인상을 심어줌과 동시에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민속품은 어떠한 침략이나 약탈 없이 제국주의 프랑스의 손으로 들어갔고, 제국의 시선으로 쓰인 여행기로 한 번 더 기록되고 있었던 것이다.

4.맺음말

전술한 바가 있듯 파리기메동양박물관은 에밀 기메에 의해 설립된 박물관으로, 파리에 있는 가장 큰 아시아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유물들도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한국의 유물이 한국실이라는 전용관에 놓여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기메동양박물관에 한국실이 생길 수 있었던 이유는 샤를 바라의 조선 횡단을 통한 민속품 수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며, 실제로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서도 한국 민속에 대한 연구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1889년에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전시된 그의 수집품은 그 규모가 작았다 하더라도 조선을 알리는데 하나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의 시선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그의 기행문인 『조선 기행(Deux voyages en Coree)』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한편으로 민속품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행위나 여행기에 드러난 시선들은 자국인 프랑스가, 당시의 서양이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또 그만한 자본과 국력이 축적된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강대함의 요소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해양에 대한 인식과 적극적으로 펼쳤던 해양 진출 정책의 성과가 아닌가 싶다.

한국실(Coree)가 있다.

한국실(Coree)가 있다.

동양의 물건들을 구경하는 모습

동양의 물건들을 구경하는 모습

위치보기

1) 이창훈, 「프랑스의 해양 인식과 동아시아 해군 정책」,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49, 2018, 279p
2) 이창훈, 「프랑스의 해양 인식과 동아시아 해군 정책」,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49, 2018, 281-282pp
3) 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한국미술 전시 역사: 샤를르 바라의 한국 여행과 기메박물관 한국실의 설립」, 한국학 연구 45, 2013.6, 45p
4) 최고은, 「19세기 프랑스의 한국 표상과 서사 – 샤를 바라 여행기와 기메동양박물관을 중심으로 -」, 지역과 문화 4권, 2, 70p
5) 샤를 바라, 『조선 기행(Deux voyages en Coree)』, 눈빛, 2006.01, 116p
참고문헌
"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한국미술 전시 역사: 샤를르 바라의 한국 여행과 기메박물관 한국실의 설립」, 한국학 연구 45, 2013.6
최고은, 「19세기 프랑스의 한국 표상과 서사 – 샤를 바라 여행기와 기메동양박물관을 중심으로 -」, 지역과 문화 4권, 2
샤를 바라, 『조선 기행(Deux voyages en Coree)』, 눈빛, 2006.01
이창훈, 「프랑스의 해양 인식과 동아시아 해군 정책」,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49, 2018
김남혁(역)·메이 루이스 프랫, 『제국의 시선』, 201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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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혜정
  • 소속 :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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