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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망대에서 본 내일

고성 통일전망대
  • 탐방일시 :2019.09.19 ~ 2019.09.19
  • 조회수 :1042
  • 좋아요 :0
  • 위치
    강원 고성군 현내면 금강산로 481
  • 키워드
    통일전망대, 통일, 금강산, 이산가족, 해금강, 북한, 민통선

대한민국에서 북한 땅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인 고성군 통일전망대는 1983년 남북 분단의 아픔을 달래고, 통일의 염원을 담아 세워진 곳이다. 휴전선과 겨우 3.8km 떨어진 곳으로 가까이는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과 멀게는 금강산 해금강의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다. 또 많은 실향민들이 이북을 그리워 하는 마음으로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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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대한민국의 맨 끝자락 고성

인구 3만이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도시는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 추계답사 강원도의 맨 꼭대기 지점이자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는 최북단 지역, 또 고향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도시 바로 고성이다. 고성은 북한과 직접적으로 접하는 지역으로 웅진군, 철원군과 함께 남북한 모두 존재하는 지역이다. 즉 남북 분단의 역사 속 산증인이기도 하다. 한반도 현대사의 시작과 함께 고성군도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것도 잠시,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주인이 되지 못했다.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에는 미국과 소련이 뒤이어 들어왔다. 소련과 미국은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나누게 되었고 이때 고성은 삼팔선 이북지역으로 북한의 통치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강원도 동부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끝내 남한이 고성군 일부 지역을 수복하게 되었고,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고성은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현재까지 고성군 북부지역은 북한이, 남부지역은 남한이 관할하고 있다.

Ⅱ. 통일전망대가 보여주는 것

북한 땅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 단 2곳뿐이다. 하나는 파주에, 또 하나는 이곳 고성의 통일전망대이다. 1983년 남북 분단의 아픔을 달래고 통일의 의지와 염원을 담아 고성군 최북단에 통일전망대가 세워졌다. 휴전선과 겨우 3.8km로 떨어진 위치에서 통일전망대는 북한 땅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가까이는 경계를 나누는 철조망과 멀리는 금강산과 해금강까지 빼어난 자연경치는 두 눈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통일전망대를 통해 이북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실향민의 눈물과 아픔을 달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또 금강산 육로 관광의 길목에 위치하여 남북협력과 교류에도 의미가 깊은 장소라 할 수 있다.
통일전망대에는 단순히 전망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종교에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만든 통일 미륵불, 성모 마리아상, 전진 십자 철탑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근처에는 한국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625전쟁 체험전시관, 351고지 전투 전적비, 충혼탑이 있어 남북 분단의 아픔과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성 통일전망대의 모습

▲고성 통일전망대의 모습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Ⅲ. 남북관계가 지나온 길

1. 부딪히는 이념의 대결

남북을 오가던 기차는 멈춰섰다. 분명 사람과 물자가 오갔던 기차역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정적인 겨울 풍경처럼 남북도 얼어붙었다.
한반도의 모든 사람의 일상을 빼앗아 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3년 1개월, 765번의 회담의 결과는 휴전이었다. 한국전쟁의 결과는 아주 참혹했다.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민가를 비롯한 많은 건물과 공장과 같은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승패 없는 이 전쟁은 겨우 끝이 났지만,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상처를 씻기 위한 복구 작업이 진행될수록 남북한 서로를 향한 적개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만든 사상적인 두 이념의 대립은 한반도에서만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전쟁은 끝이 났지만 차가운 전쟁, 이른바 냉전의 시대가 세계를 지배했다. 미국과 소련 두 국가의 제한적인 대결상태에 그들의 동맹국 역시 반대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남북한 역시 그러했다.
먼저 남한에서는 반공산주의가 사회를 지배했다. 진보적인 정치이념을 가진 정당과 인사를 소위 “빨갱이”라고 규정하며 탄압받았다. 한편 북한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휴전 후 김일성의 독재체제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전쟁의 책임을 남로당1) 계열로 돌리고 대대적으로 숙청을 벌였다.
두 개의 이념이 만든 남북한의 대치는 당시 극단적인 상황을 잘 보여준다. 서로를 인정하는 발언과 태도는 처벌의 대상이었으며, 오로지 상대방의 체제 비난과 경쟁, 도발 그리고 자신 체제에 대한 우월의식뿐이었다. 각종 반공 행사와 선전물, 교과서 등 남한은 남한대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장했고, 북한 역시 남조선혁명론2)을 앞세우며 극단적인 대결구도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2. 대결 속의 대화

“안녕하십니까3)” 전쟁 이후 남북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첫 대화였다. 양 진영의 대표의 긴장 속에서 남북 대화는 시작되었다. 1971년, 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공식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기나긴 냉전 체제의 긴장이 완화되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각각 미국과 중국의 후원으로 남북은 최초로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평양과 서울에서 열린 여러 차례 예비회담과 본 회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관계를 알았고, 그 결과로 이듬해에는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남북이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고 무력이 아닌 평화와 자주 그리고 민족적 대단결을 통한 통일을 이루기 위한 최초의 합의서이다. 대화의 방법을 통해 통일을 이끌어간다는 점, 앞으로 있을 남북대화에 있어 중요한 시작점이 된 합의서라고 할 수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이 발표되고 나서 이산가족의 생사를 알리는 문제, 이들 간 자유로운 상봉과 서신문제 등등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들에 대해서도 논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대화를 통한 남북 긴장이 해소되는 듯 보였지만 잠시뿐이었다. 대화가 멈추자 다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결국 남북 공동 성명은 남북 정권 자신들의 권력 기반 강화에 사용되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한 독재체제를,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강화한 1인 통치체제를 확고히 했을 뿐이었다. 또 남북 대화로 분주했던 판문점 역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이는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4)으로 다시 남북 대결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3. 냉전의 끝과 찾아온 새로운 바람

이전까지 남북관계에 있어 큰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이 평화를 위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1984년 여름 남한에 많은 비가 내렸다. 특히 서울ㆍ경기 지역에서 집중호우로 인해 최악의 홍수 사태를 겪었다. 남한의 수해 소식을 전해 들은 북한은 방송을 통해 수해 지역 이재민들에게 쌀과 옷감,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정치 공세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로 남한 내부에서도 제의에 수용할 것인지 많은 고심을 했지만, 이례적으로 제의를 받아들였다. 1986년과 1988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전에 평화분위기를 조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북한 측에서는 수해 물자를 해로를 통해 보냈고, 남한에서는 답례로 카세트 라디오를 비롯한 18개 품목이 든 선물 가방을 보냈다.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간 물자교류의 모습으로 남북한 부드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의 남북관계를 계절로 비유하자면 차가웠던 냉전의 얼음이 서서히 녹는 늦겨울, 하지만 아직 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냉전의 벽 안에서 남북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와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 독일의 통일 등 냉전의 해소가 남북한 본격적으로 의미 있는 대화에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7·7 특별 선언5)’을 통해 북방외교와 남북관계의 추진 방향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북한과의 대결을 종식하고, 관계를 개선해 지속적인 상호교류를 만들자는 것이다. 대화를 통한 만남이 이어졌다. 총리를 비롯한 여러 차례 남북 고위급 회담이 개최되었으며, 그 결과로 화해와 불가침, 교류와 협력 등에 관한 기본 합의서6)가 채택되었다.
민간차원에서 남북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통일축구대회나 통일문화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 출전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한 비핵화 공동 선언에도 합의하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의 대화를 통한 진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면 항상 강하게 부는 바람과 추위가 있는데 이를 꽃샘추위라고 부른다. 남북한 분위기에서도 봄이 오기 전 잠시 추운 바람이 불었다. 다음 바통을 이어받은 김영삼 정부7)는 전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핵 확산 방지조약 탈퇴와 전쟁위기가 대두되는 등 남북관계를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이를 반전시키고자 미국의 중재로 북한의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이끌어내고 고위급 회담도 준비했었다. 1994년, 예상치 못한 김일성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산되었고, 국내에서는 김일성 사망8)에 따른 조문문제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김영삼 정부는 국내정치가 외교보다는 중시한 입장으로 결국에 민ㆍ관 둘다 조문을 금지하게 되었다. 이후 남북관계는 미래가 아닌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남북관계의 회복까지는 다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야 됐다.

4. 새천년 평화의 시작

11월, 늦가을 항상 이맘때쯤이 되면 뉴스에서 단골주제로 매번 등장하는 화두가 있다. 바로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 선정이다. 인류 역사에큰 공헌을 했다는 그 상징성 때문에 매년 올해는 혹시 우리나라 사람이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들게 한다. 아직 우리나라 유일한 노벨상은 김대중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이다. 이 상에는 남북 평화에 대한 노력이 함께 담겨 있다.
이전까지 잠시 어두웠던 남북관계는 새로운 세기를 맞아 다시 평화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후 햇볕 정책9)이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대북 포용 정책을 펴게 된다. 또 이전 정부에선 보여 주었던 하나의 통일정책에서 나아가 남북통합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성급한 흡수통일의 방식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화해와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이러한 햇볕정책의 핵심이다. 햇볕정책이 추진되면서 심각한 경제난과 기근을 겪고 있는 북한을 지원하거나 남북 스포츠 교류 또한 활성화되었다. 또 15년 동안 중단되었던 이산가족의 상봉과 금강산 관광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남북 두 대표의 첫 만남, 2000년 6월 13일 첫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북한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 이에 화답하듯 공항에 마중 나와 직접 영접하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은 새천년 평화의 시작을 알린 듯했다. 2박 3일간 일정과 세 차례의 회담 끝에 ‘6·15 남북 공동 선언’이 채택되었다.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남북한 통일에 대한 합의 도달과 경제 협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계승하여 다음 노무현 정부에서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근간으로 북한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력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2007년 다시 한번 남북정상회담을 끌어내 ‘6·15 남북 공동 선언’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여러 방안에 대해 합의할 수 있었다. 포기했던 북한의 핵실험 재전개10)와 두 차례의 연평해전11) 등 항상 순탄하게 진행되었던 남북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대결보다는 남북한 스스로 대화를 통해 풀어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5. 그래도 봄은 온다

남북관계는 대결에서 대화와 합의의 반복을 통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졌지만,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드러웠던 남북관계는 다시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 천안함과 연평도 폭격 사건과 계속되는 핵실험, 도발과 위협들 남북관계는 서로에게 증오와 깊은 상처만을 준 채 시간은 흘러왔다.
그 후 2018년 평창올림픽을 기점으로 다시 남북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남한에서 열린 첫 동계 올림픽이 계기였다. 우리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북한에 평창올림픽의 참가 제안을 하게 되고, 이 참여 제안으로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녹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남북한은 이후 고위급 인사들이 오가면서 주요 회담이 이루어졌고, 남북 예술단의 합동 공연과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구성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남북 교류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그해 봄 4월 27일 서울의 봄이라는 큰 주제로 남북한의 역사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휴전선 경계에서 두 정상이 만나 손을 잡았다. 세계의 모든 언론이 주목하고, 새 시대를 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좋은 분위기 속에 진행된 판문점 회담 이후 이른 시간 안에 재회담이 이루어졌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북측이 먼저 제의한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이번엔 평양에서 열렸다. 그동안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에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끝나지 않았던 전쟁상태였던 한반도 긴장 상황은 사실상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Ⅳ. 이산가족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레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시는 1926년 마산에서 활동한 이완수 시인이 발표한 고향의 봄이라는 동시이다. 작곡가 홍난파가 음을 붙여 동요로 많이 알려진 노래이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남한에서는 워낙 유명한 노래지만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역시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다. 필자는 어느 한 방송을 통해 이산가족이 서로 상봉하여 이 고향의 봄을 서로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남북한 가족이 서로 헤어지고 살아온 지 60년, 각자 살아온 이야기는 다르지만 어린 시절 그리운 고향의 모습과 부모ㆍ형제 함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같은 마음이다.
남북 이산가족은 분단이 낳은 최대의 비극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한반도에는 약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12). 이산가족들 대부분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의 끝은 분단이었고, 아무도 남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었다. 떠난 가족들과 영영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고향 땅도 더는 밟을 수 없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뒤로한 채 기약 없는 세월만 흘렀을 뿐이다.
남북관계가 조금씩 진전됨에 따라 이산가족 역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1985년,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분단 30년의 기다림 끝에 남북한 고향 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남측 35가족과 북측 30가족이 만날 수 있었다. 감동적인 이산가족의 상봉이었지만 단발적으로 이루어진 상봉이었다. 또 당시 전체 이산가족 수에 비하면 너무나도 적은 만남이었다.
남북한 고향 방문단이 있고 난 뒤 다시 15년이 지난 2000년, 남북한 좋은 분위기 속에 ‘6ㆍ15 남북 공동 선언’을 계기로 다시 이산가족 재상봉이 이루어졌다. 금강산에서 2015년까지 21차례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이어졌으며, 남북 4,185가족 1만 9,928명이 가족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대면 상봉이 아닌 화상과 서신 교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산가족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현재까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수는 13만 3,299명(2019년 기준13))이다. 그중 생존자는 절반이 안 되는 5만 4,891명 정도이며 절반 이상이 가족들을 그리워 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는 가족들 역시 대부분이 고령화로 단 한 번만이라도 부모, 형제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하루라도 빨리 남북한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더 많은 이산가족들 재상봉이 필요할 뿐이다.

▲이산가족 상봉 모습

▲이산가족 상봉 모습

Ⅴ. 끝으로

우리나라는 아직 분단국가이다. 분단국가임을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느끼고 살진 않는다. 하지만 고성 통일전망대 올라서서 바라본 북한의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분단국가가 가지는 현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의 자리, 전투가 벌어져 친구를 잃은 곳, 아름다운 국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안보 교육의 현장 등등 통일전망대는 많은 의미를 간직한 채 오늘도 많은 사람이 방문해 통일전망대의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통일이 과연 필요할까? 남북관계가 진전될수록 많은 사람이 이 질문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많은 통일 교육을 받아왔다. “남북한은 원래 같은 민족이었지만, 이념으로 인한 전쟁과 분단, 갈등이 계속되어왔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통일은 필연적이다.”라고 필자는 배워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통일이 필요하다는 생각보다 현재 북한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통일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다.
분명 통일은 동면의 양면처럼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통일된다면 먼저 국토가 확장되고 인구가 늘어나게 된다. 내수 시장이 커지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또 경제적 남북 대치로 쓰이는 국방비를 다양한 분야에 투자해 발전시킬 수 있다14).
반면 남북의 각기 다른 문화적 사회적 이질감이 심화되고, 빈부격차지역감정과 같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 할 수도 있다. 또 통일하는 데 드는 비용의 부담도 다음 세대까지도 큰 부담이 될 수 있다15).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우리 세대의 입장에서는 남북통일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반도 전체에 평화와 발전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에 대한 개선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몇 달 전 낡은 교과서와 상상만 하던 장면들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다. 남북 두 정상이 분단의 상징인 군사 분계선을 넘나들고 서로 웃으면서 악수하고, 통역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남북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음악을 서로 보여주기도 하고 만찬으로 나온 평양냉면을 같이 즐겼다. 또 백두산에 나란히 올라 아리랑 노래를 듣거나, 경기장에 단상에 같이 올라 평화를 위한 연설을 진행했다. 다음은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일정 중 평양의 능라도 경기장에서 북한시민을 대상으로 한 연설의 일부이다.

“우리는 5천 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

연설의 내용대로 남북관계는 쉽게 잘라낼 수 없는 관계이다. 떨어져 지낸 시간보다 함께 지낸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둘로 나누어져 생활하고 있지만, 우리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 세대 전까지는 남북 사람들은 어느 마을 동네 친한 친구였고 같이 독립운동을 한 동료였으며, 부부의 연을 맺은 배우자였다.
이념과 생각의 차이로 단절된 반세기가 넘는 시간, 남북관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북 사람들의 많은 만남과 교류가 있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16)에서 보듯이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쳐지면서 그렇게 우리는 나아갈 것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던 남북관계였지만, 조금씩 하나의 평화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필자는 계속해서 남북이 서로를 이해하고 더 많은 교류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남북이 같은 방향으로 발을 맞춰 관계를 더욱 개선해 나간다면 한반도 전체의 평화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우리의 먼(?) 또는 가까운 사학과 후배들이 남한이 아닌 북한지역의 답사를 위해 열심히 머리를 싸매면서 답준위 회의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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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조선노동당의 약칭, 휴전협정 이후 남로당의 당수인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을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으로 몰아 체포되었다.
2)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으로 정식화된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 남한의 노동자ㆍ농민 등이 주체가 되어 혁명을 수행한 후 남북한 합작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전략이다.
3) 1971년 8월 20일, 26년 만에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 북측대표 서성철과 남측대표 이창렬 대표가 처음으로 나눈 말이다.
4)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30여 명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사건, 이후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서도 남북 경계가 설정되었다.
5) 1988년 7월 7일에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이다.
6) 1991년 12월 10부터 13일까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이후 이듬해 9월 정치, 군사, 교류협력 각 분야에 관련한 3개의 부속합의서가 채택ㆍ발표되었다.
7) 대통령기록관 대통령기록연구실 “김영삼 대통령 안보ㆍ통일분야”,
http://pa.go.kr/research/contents/policy/index040502.jsp, 2019.08.15.
8) 야당의원은 김일성 사망 후에도 김정일 체제에서 북한이 남북회담을 계속 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드린 반면, 보수세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9) 김대중 대통령이 영국방문 당시 연설에서 사용한 후에 정착된 용어로 이솝 우화에서 겨울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하는 방법에서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었다는 내용에서 유래했다.
10) 2002년 10월 3일 2차 북핵 위기
11) 1999년, 2002년 연평도 근해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12) 대한적십자사 2005 『이산가족찾기 60년』, 웃고문화사 5쪽.
13) 여현철, 2019, 「남북 이산가족 교류 현황과 문제 해결 방안」, 『"Journal of North Korea Studies Vol.5 No.1』, 고려대학교 공공정책연구소 2쪽.
14) 네이버포스트 “북한과 통일되면 좋은 점”,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5978568&memberNo=15460571, 2019.08.14. 인용.
15) 네이버포스트 “북한과 통일되면 안좋은 점”,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5983638&memberNo=15460571, 2019.08.14. 인용.
16)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참고문헌
학술논문

1. 여현철, 2019, 「남북 이산가족 교류 현황과 문제 해결 방안」, 『"Journal of North Korea Studies Vol.5 No.1』, 고려대학교 공공정책연구소.
2. 통일연구원, 2013, 「남북관계연표 1948년~2013년」, 『통일연구원 기타간행물』 통일연구원편집부.



1. 김연철, 2018, 『70년의 대화』, 창비.
2.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 2009, 『남북관계사 갈등과 화해의 60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3. 대한적십자사 2005 『이산가족찾기 60년』, 웃고문화사.

사이트

1. 통일부 블로그, “[대한민국의 대북정책 (1)] 노태우-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https://unikoreablog.tistory.com/2758, 2019.08.15.
2. 통일연구원, 2013, 「남북관계연표 1948년~2013년」, 『통일연구원 기타간행물』 통일연구원편집부.
3. 평화문제연구소 “기획특집통일정책 50년, 남북교류 50년 사진과 일지로 본 남북관계사 50년”,
http://ipa.re.kr/ipa2008.artyboardv15/mboard.asp?exec=view&strBoardID=UnityKorea_02&intPage=8&intCategory=0&strSearchCategory=%7Cs_name%7Cs_subject%7C&strSearchWord=&intSeq=14789&SearchYear=&SearchMonth=,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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