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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화합의 장소 삼화사(三和寺)

두타산 삼화사
  • 탐방일시 :2019.09.18 ~ 2019.09.18
  • 조회수 :690
  • 좋아요 :0
  • 위치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산176
  • 키워드
    삼화사, 수륙재, 화합, 동해, 무릉계곡, 사찰, 비빔밥

동해 무릉계곡에 위치한 삼화사는 뛰어난 풍경과 함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다. 천년고찰답게 창건 설화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특히 삼화사는 화합과 화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후삼국 유민들을 화합시키겠다는 의미에서 삼화사라는 이름을 지었고, 조선 건국 직후 고려의 죽은 왕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수륙재가 최초로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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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화합의 비빔밥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면 ‘봉림사’라는 절이 하나 있었다. 불교의 큰 행사인 부처님오신날, 이날도 대입을 위해 쉬지 않고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 공부하는데 지친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몰래 학교를 빠져나가 절에 올라갔다. 절 입구에 대충 합장을 하는 시늉을 하고 흔히 말하는 절밥을 얻어먹으러 갔다. 이미 점심을 먹은 상태였지만 절밥으로 나온 산채 비빔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아직도 가끔 그 절에 올라갈 때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필자가 절에 올라 먹었던 비빔밥은 우리나라 사찰 고유의 음식이다. 스님들의 수행에 금기시되는 육식과 오신채1)를 넣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비빔밥과는 형태가 아주 다르다. 또 좁은 절의 공간에 많은 사람을 간단하고 배불리 먹이기 위해 그릇에 밥과 봄나물을 담은 비빔밥을 주로 공양을 했다.
절의 비빔밥 공양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여러 가지 나물들이 밤과 함께 한 그릇에 모여 어우러져 하나의 맛을 낸다. 그래서 비빔밥을 화합과 협력의 상징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일체중생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비빔밥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준비한다. 또 먹는 사람들 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비빔밥을 먹는다. 이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공양을 주고받는다. 비빔밥이 평화와 화합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이번 가을 추계 답사의 첫 번째로 가는 사찰, 삼화사 역시 사찰의 비빔밥처럼 화해 그리고 화합과 많은 관련이 있다. 무릉계곡을 품에 안고 고적히 자리 잡은 천년고찰 삼화사의 이야기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Ⅱ. 삼화사 어디까지 가봤니

1. 두타산의 무릉계곡

무릉반석

무릉반석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

위의 글씨는 두타산 초입 무릉계곡 바위에 쓰인 암각서이다. 이곳 무릉계곡을 잘 나타내는 글씨이기도 하다. 뛰어난 명승지를 상징하는 무릉선원(武陵仙源), 천석(泉石), 동천(洞天) 네 단어가 한 구절에 전부 다 들어가 있다. 누가 썼는지 대해 강릉부사 양사언2)이 썼다는 설과 삼척부사 정하언3)이 썼다는 설 두 개가 공존한다. 하지만 누가 썼는지 간에 아름다운 무릉계곡의 자연환경을 보고 반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깎아내린 바위 절벽의 전경 맑은 계곡물이 녹아내리는 곳, 그 경치에 반해 하늘의 신선도 노닐었다는 곳, 바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풍경을 자랑하는 동해 무릉계곡이다. 무릉계곡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삼척부사로 왔던 김효원4)이 뛰어난 경치에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며 무릉도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당대 많은 시인과 묵객, 고승과 수도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이를 증명하듯 무릉계곡의 바위에는 많은 옛 선인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는 글씨를 새겨 놓기도 했다. 이후 무릉계곡은 1977년 국민 관광지 1호로 지정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수려한 경치를 즐기려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무릉계곡의 수려한 경치를 뒤로 한 체 좀 더 올라가 보자.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가다 보면 다리가 하나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서 보이는 절이 바로 이번 추계 답사 목적지인 두타산 삼화사이다. 무릉계곡을 안고 있는 삼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의 말사이자 동해시 최대의 사찰이다.

2. 삼화사의 창건 설화

‘사찰은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5)라는 말이 있다. 불교의 사상 중 인연생기(因緣生起)라는 말이 있듯이 원인 또는 그 이유가 있기 때문에 결과가 생긴다. 사찰 역시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며, 지어지게 된 이야기 즉 창건 설화가 항상 전해진다. 무릉계곡과 함께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답게 삼화사 창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공존하여 전해진다.
첫째,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당시 신라의 정세는 내외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안으로는 비담과 염종의 반란6)이,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과 함께 당 태종이 호시탐탐 신라 국내정치에 개입하고자 한 상황이었다. 국운이 달린 상황에서 선덕여왕은 반전의 카드로 불교를 꺼내 들었다. 불교를 통해 더욱 강력한 국가 정신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런 계획 속에 먼저 당나라에 유학 중인 자장 율사를 신라로 불러들인다. 그 후 수도 경주에는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고 지방에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불교 성역화를 추진한다. 불교의 힘으로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던 이런 과정에서 삼화사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통일신라 시대 말 불교도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 경전과 교리 중심의 교종에서 참선을 위주로 하는 선종으로 변해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삼화사가 창건되었다는 설이다. 『강원도지』와 『척주지』의 기록에 따르면 선종 승려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동해와 삼척지역으로 왔다고 한다. 이들은 많은 선종 사찰을 창건했는데 그중 하나가 흑련대(黑蓮臺)7) 즉 삼화사였다고 하는 설이다.
계속 선종이 확산하면서 전국에 9개의 지방산을 중심으로 문파가 형성된다. 그중 영동지역에는 강릉김씨 호족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사굴산문8)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굴산파를 처음 만든 뛰어난 스님이었던 범일국사9)가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절을 짓고 사굴산문에 편입되었다. 이 절이 나중에 이름을 고쳐 삼화사가 된다는 설이다.
세 가지 창건설 중 어느 것이 맞고 틀린다고 하는 것은 오늘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히 정확한 정답은 없지만, 각각의 창건설을 미루어볼 때 먼저 자장율사에 의해 삼화사의 기초를 닦고 그다음에 선종 승려와 범일국사에 의해 선종 사찰이 되면서 점차 확장되어 나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화합의 상징이 되는 이유

삼화사는 나라가 건국될 때마다 화해와 화합의 장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먼저 ‘흑련대, 삼공암’ 이라고 불렸던 절이 삼화사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통일신라 시대 말 국가의 기강은 해이해져 정부의 지배력은 크게 약해지고 지방 호족들의 힘은 커져만 갔다. 신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더욱 커질수록 농민들의 부담 역시 가중되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등장한 견훤, 궁예, 왕권과 같은 새로운 인물들이 활동하던 후삼국 시대의 시작이었다.
후삼국 시대의 승자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었다. 고려를 개창한 왕건이 첫 번째로 한 일은 먼저 후삼국 유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재산을 잃은 유민들의 슬픔과 불만을 달래기 위해 전국의 인연 있는 사찰에 천도재10)를 베푸는 등 민심 수습에 총력을 기울였다.
통일 이전부터 삼화사는 영동지방의 사찰로써 왕건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왕건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삼화사는 통일 이후에도 왕건의 민심 수습정책에서도 중심적인 일을 하던 사찰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 왕건은 앞으로 후삼국의 화해와 화합을 도모한다는 의미로 절의 이름은 삼화사(三和寺)라고 하였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고려왕조의 시작을 함께했던 삼화사, 마찬가지로 고려가 끝이 나고 새로운 나라 조선이 한반도에 건국되었을 때도 함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재를 거행한다. 국행수륙대재 시행의 목적은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고려 왕실의 혼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었다. 삼화사에서 이런 의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삼척ㆍ동해 지역이 고려 왕족의 마지막을 함께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전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은 왕조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야만 하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수도에서 쫓겨나 겨우 이곳 삼척ㆍ동해 지역으로 온 뒤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에 이성계는 고려 왕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수륙재를 봉행했고 삼화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 결국, 삼화사는 지리적 변방에 있지만 새로운 국가의 건국과정에서 화해와 화합의 역할을 해온 중요한 사찰이다.

4. 삼화사의 부처님

1) 철조노사나불에 대해
모든 절에는 부처님 혹은 보살님을 모신다. 주변에 있는 아무 절이나 들어가도 여기저기 부처님들이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신다. 삼화사의 중심이 되는 본전, 적광전(寂光殿)11)에는 철로 된 부처님이 계신다.
이 불상의 정식 이름은 ‘철조노사나불좌상’이며 현재 보물 1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체의 옷깃과 안면의 조각이 무척 정교하고 우수하며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이 철불상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모습은 지금과 아주 달랐다. 하반신과 두 손이 전혀 없는 상태로 훼손 상태가 매우 심했다. 한때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려 갈 뻔한 일도 있었으나. 다행히 이후 복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삼화사의 법당에 안치될 수 있었다.
불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불상의 뒷면에 160 여자의 명문이 적혀져 있었는데, 확인 가능한 140 여자를 통해 철 불상의 연대와 존명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명문을 해석한 결과 2차례의 직접적으로 언급된 불상의 부처는 노사나불12)이며, 통일 신라 말에 활약한 결언 스님이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화사 적광전

삼화사 적광전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13)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13)

2) 철 불상의 비밀

철 불상의 명문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불상의 제작 배경과 제작 이유에 대해 간접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불상을 제작한 결언 스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통일신라 하대로 이때 통일신라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다툼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치열한 왕위 다툼과 반란은 제48대 왕인 경문왕에 이르러서야 일단락된다.
경문왕은 왕이 된 직후 먼저 중앙집권과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불교는 지방 세력에게 무너진 왕실에 대한 권위와 믿음을 다시 갖게 하고, 민심을 다스리는 최고의 카드였다. 경문왕은 왕실에 반감을 품은 정치 세력의 근거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종의 후원 형식으로 그 지역의 사찰에 철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삼화사가 위치한 지역(옛 명주 지역14))은 경문왕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정치 세력이었던 김주원15)계 왕족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같이 삼화사에 철불을 조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삼화사에 철 불상은 왕위 다툼으로 인한 곤두박질친 왕실의 위엄을 다시 바로 잡고, 지방 정치 세력을 포섭해 왕권 강화를 꾀했던 경문왕의 의도가 담겨 있다.

Ⅲ. 국행수륙대재에 대해서

1. 수륙재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도 종교 의례 즉 불교 의식이 존재한다.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하기 위해 연들을 다는 연등회나 죽은 사람을 위한 천도재, 영산재가 그 예이다. 특히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를 다루면서 죽은 자의 영혼이 평온한 다음 세계로 안전하게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내는 의식이 바로 수륙재이다.
수륙재의 글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물과 육지에서 죽은 여러 영혼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의례는 수륙재 말고도 있지만, 불특정 다수를 위한 의례는 수륙재뿐이며 이런 면에서 사회성이 높은 불교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수륙재의 첫 시작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최초로 개최되었다. 남조 양나라의 무제에 의해 처음 수륙재를 시작으로 이후 등장하는 중국 왕조에 수륙재를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고려 시대 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수륙재를 개최했다. 왕실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수륙재는 계속 유지됐다.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면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도 수륙재는 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맥을 이어갔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개국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고려 왕족의 혼을 달래기 위해 삼화사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것이 조선 시대 수륙재의 시작이다.

2. 삼화사에서 고려 왕족들의 혼을 달래다

“임금이 수륙재(水陸齋)를 관음굴(觀音堀)·현암사(見巖寺)·삼화사(三和寺)에 베풀고 매년 봄과 가을에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 고려의 왕씨를 위한 것이었다.16)

그렇다면 왜 다른 사찰도 아닌 삼화사에서 수륙재가 시작되었을까 삼화사에서 국행수륙재가 시행된 이유에서는 2가지 정도 배경이 뒤따른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한 국가에 두 왕조는 존재할 수 없었다. 고려왕조는 국가의 운명에 따라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사헌부의 주청을 받아들여 고려 왕족들을 개성에서 강화도와 거제도로 내쫓았다. 그러고 나서 이들을 모두 바닷물에 던져 죽였다.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도 마찬가지로 폐위되고 두 아들과 함께 원주와 고성을 거쳐 삼척ㆍ동해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그 후에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공양왕 역시도 죽임을 당한다. 공양왕의 죽음을 들은 이성계는 자책감을 느껴 얼마 뒤 왕실 주도로 국행수륙재를 시행한다. 이를 통해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고려와 관련된 사람들을 위로하고, 포용하여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바로 조선 왕실과 삼척ㆍ동해 지역 간의 관계이다. 동해ㆍ삼척 지역은 조선의 건국이 시작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잠시 정착하고 살았던 곳이 바로 이곳 삼척ㆍ동해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안사는 삼척 지역에 있는 동안 삼화사가 있는 두타산에 두타산성을 쌓거나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배를 만들었다. 그리고 삼척을 본관으로 하는 삼척김씨와 결혼하면서 이 지역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삼화사 역시 한때 이안사가 손수 베껴 쓴 경전이 보관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조선건국 전후로 삼화사는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 발전시켰던 것이 삼화사가 국행수륙대재가 거행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다.

3. 조선 시대에도 수륙재는 계속된다

태조 이성계 때 처음 수륙재가 시작된 후로도 수륙재는 계속되었다. 물론 수륙재를 할 때마다 반대하는 몇몇 여론이 있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죽은 이들의 혼을 기린다는 명분에 따라 반대 여론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숭유억불이라는 국가의 기본정책을 내세우면서도 수륙재를 국가에서 주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태조 이성계 이후 연산군까지 총 32회 이상의 수륙재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중종 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해 정치를 좌우할 힘을 가진 이후 국가가 직접 주도하는 수륙재는 점차 약화하여 갔다. 그런데도 수륙재는 여러 사찰과 민간에서 단절되지 않고, 여전히 지속하였다. 특히 삼화사는 수륙재의 중심사찰로써 조선 시대에도 그 지휘를 명백히 한다. 이는 삼화사가 있는 삼척ㆍ동해 지역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삼척ㆍ동해 지역은 일찍이 동해안을 통한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었으며 조선 시대 ‘삼척진(三陟鎭)17)’이라는 군사기지로써 활용된 곳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왜군들과 삼화사 인근 두타산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전투가 잦은 지역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삼화사의 수륙재가 계속해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다시 말해 삼화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륙재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찰인 셈이다.

Ⅳ. 화합을 위해

오늘날에도 매년 10월이 되면 삼화사에서 수륙재가 열린다. 수륙재가 열릴 때면 수륙재를 위한 제단을 설치하는 거사18)님과 삼화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봉양을 준비하는 보살님들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수륙재를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다들 성실히 임하고 즐기는 모습이 가득하다. 일년에 딱 한 번 치르는 이 의식을 위해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수륙재를 준비하는 것이다. 앞서 비빔밥 공양과 마찬가지로 수륙재 역시 그 자체로 사찰 사람들의 화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재 상황에 있어서 삼화사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바로 ‘화해와 화합’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음이 만나 하나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갈등을 부드럽게 잘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화합은 필수적이다.
새 왕조의 위대한 시작과 이전 왕조의 마무리를 함께한 절 ‘삼화사’는 이러한 화해와 화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삼화사는 앞으로도 화합과 화해의 상징으로 변함없이 지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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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에서 먹지 못하는 다섯 가지 채소(마늘ㆍ파ㆍ부추ㆍ달래ㆍ아위), 대부분 자극이 강하고 냄새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2)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초서체로 이름을 날렸다.
3) 조선 후기의 문신, 사간원의 초고위직인 대사간을 지냈으며, 문신으로 독서를 좋아하고 문예ㆍ글씨에 능했다.
4) 조선 중기의 문신, 삼척부사를 지냈으며 사후 삼척 경행서원에 제향 되었다.
5)『사찰, 어느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책 제목 인용.
6) 647년 선덕여왕 시기 상대등 비담이 염종과 더불어 왕위계승에 반감을 갖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되었다.
7) 약사삼불(藥師三佛)의 세 형제가 우리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대, 둘째는 청련대, 막내는 금련대에 각각 머룰렀다고 하며, 이곳이 현재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8) 강원도 굴산사를 중심으로 한 구산선문 중 하나로 신라의 변방에 위치한 점, 명주지역이 왕위 쟁탈전에서 탈락한 김주원계 인물들의 근거지인 점으로 인해 신라 왕실과 대립적인 경향을 보인다.
9) 강릉출신의 신라의 선종승려이자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창조이다.
10)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불교의식 대표적으로 49재, 100일재 등이 있다.
11) 화엄세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건물의 이름이다.
12) 비로자나불, 노사나불은 산스크리트어 Vairocana 를 음역한 것으로, 비로사나, 비로절나, 폐로차나, 로사나, 차나 등으로도 불린다.
1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12920000,32&pageNo=5_2_1_0, 2019.08.10.
14) 강원도 강릉 지역에 있었던 지명으로 삼화사는 간접적으로는 경주와 명주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다.
15) 태종무열왕계 자손으로 통일신라 37대 왕 선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왕위 계승자로 내정되었으나 김경신에게 뺏기고, 이후 명주군왕에 봉해졌다.
16)『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2월 24일 무자 3번째 기사』.
17) 강원도 삼척에 설치한 육군과 수군의 진영이다.
18) 불교에 귀의한 남자 신도를 거사, 여자 신도를 보살로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참고문헌
학술논문

1. 유시내, 2014, 「삼화사 철불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 장일규, 2015,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성과 그 의미」, 『이사부와 동해』, 한국이사부학회.
3. 방동인, 1997, 「三和寺의 창건과 歷史性 검토」, 『문화사학』, 한국문화사학회.
4. 이종덕, 2004, 『찾아가는 문화재(14) : 무릉계곡과 삼화사 ; 계곡 풍경에 녹아 내리는 가을 길 옛 선사들의 선담이 바람처럼 쏟아지고』, 밤나물골 이야기 15권0호.
5. 장정룡, 1997, 「三和寺 鐵佛의 文化史的 意味」, 『문화사학』, 한국문화사학회.

사이트

1. 네이버 블로그, 삼척여행- 두타산 무릉계곡 오르는 해오름길 따라 삼화사와 용추폭포 산책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rkim999&logNo=22006958974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2019.08.05.
2. 삼화사홈페이지, http://www.samhwasa.or.kr, 2019.08.05.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로자나불”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122 2019.08.05.
4. 아시아경제, 2012, “초파일 절 비빔밥 먹고 '이것' 꼭 하세요”, 5월 28일.
5. 금강신문, 2016, “불교의식, 과거속으로 3.수륙재(水陸齋)”, 4월 26일.
6. 법보신문, 2004, “삼화사 철불 보물 지정”, 8월 10일.
7. 불교신문, 2019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29> 두타산 삼화사”,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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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속 : 사학과
  • 이메일 : 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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