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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이 떠있는 곳, 오대산 월정사
오대산 월정사월정사는 오대산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절이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임과 동시에 수도사찰로서 기능하던 사찰이다. 이 사찰은 한국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들을 많이 받은 곳들이기에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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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마음의 달이 떠 있는 곳, 월정사 소개
월정사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보자. 아마 시험에서 자주 나왔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많이 쓰이는 월정사와 상원사의 전나무 숲길?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책들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가 있던 곳? 이렇듯 월정사는 우리에게 멀리 있는 듯 가까운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지는 조계종 사찰로서, 강원도 남부 지역의 본사이다. 강원도 오대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오대산이라는 배경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오대산 신앙이라고 하는 사상적 바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오대산에는 상원사가 함께 존재하는데 월정사라는 본사에 속한 결사로서 이해된다. 또한 이곳에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중대 적멸보궁이 있다.
월정사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달 월(月)에 정할 정(精)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 어떤 뜻으로 지었는지,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에 관련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나온 바가 없다. 다만 오대산 동대(東臺)의 만월산에 있던 수정암을 이전 · 중창하면서 만월산의 월(月)과 수정암의 정(精)을 따 월정사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월정사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이들이 수행하다가는, 그런 역사적이며 뜻깊은 장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음 주제인 월정사의 역사 내용을 보면서 이 사실이 피부로 와닿기를 바란다.
Ⅱ. 마음의 달을 들여다 보다, 월정사의 역사
한국불교의 흐름을 요약할 때 대체로 삼국 -신라불교는 수용 · 발전기,고려불교는 국가불교의 성행기, 조선불교는 억불 · 쇠퇴기, 그리고 근대불교는 일제에 의한 수난기라고 정리한다. 월정사는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1. 삼국시대에서의 신라와 통일신라
삼국시대 한반도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산악을 숭배하는 사상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 이후 불교가 들어오면서 습합이 생겼고 이에 따라 전국의 명산에는 사찰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월정사는 그 사찰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사찰이다. 고려시대 때에서부터 관련 기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1)
월정사의 창건에 대하여 알아보자면 자장이 중국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후에 신라에서 동북방행을 결정하고 오대산을 찾고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려 암자를 짓고 기다린 데에서 시작한다.. 이후에 신효거사가 이 암자에 머물면서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당시에 신라인들이 신라를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땅(불연국토/佛緣國土)이라고 인식했었던 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장율사와 신효거사 때는 그저 허름한 움막에 지나지 않았고, 이 움막을 사찰로 중건한 이가 바로 범일국사의 제자 신의대사이다. 여기에 뒤에 유연이라 하는 이가 머물면서 더 큰 가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게 되면 월정사는 다양한 부처와 보살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오대산 신앙의 중심이 된다. 이를 증명하는 이야기가 신문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의 설화이다. 그들은 신라 신문왕의 아들로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에 청련을 보게 된다. 청련이란 푸른 연꽃으로, 불교에서 고결함을 상징하는 연꽃과 푸른색이라는 이상적인 상징의 결합체로서 이해되는 존재이다. 푸른색은 인도에서 청량을 동반한 밝은 지혜로서 일컬어지는데, 따라서 청련은 문수보살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후 보천과 효명은 청련을 보았던 자리에 암자를 세우고 수행을 시작한다. 두 사람의 오대산 수행의 시작에는 자장의 문수 신앙이 큰 역할을 한 셈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수행하던 도중 함께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바로 오대산의 오대(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앙)에서 각각 1만의 보살을 본 것이다. 그중 중앙에 등장한 보살이 문수보살이다. 또한 이후 문수보살은 특별히 진여원에서 36종의 변현을 보천과 효명에게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문수보살에게만 공양을 올렸었는데. 이는 이 보천과 효명에게서 비롯된 오만진신신앙에서 문수보살이 중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오대산의 신앙화에 큰 영향을 끼친 요인이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수 신앙을 중심으로 대승불교를 통합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통일신라의 불교 황금기를 구가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일컬어진다.
신라의 오대산 신앙은 자장에 의해서 중국의 오대산 문수 신앙이 이식된 경우이다. 하지만 제대로 정착하게 된 것에 관련해서 자장의 역할보다는 보천과 효명의 오만진신신앙의 역할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결코 자장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장이 있었기에 오대산 신앙이 한국에 자리 잡을 수 있던 것이다.
2.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월정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사실 많지 않다. 월정사는 수행을 위한 절에 가까워 속세와의 연을 끊은 듯이 존속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월정사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유물이 있으니 바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시대는 국가불교의 전성기였다. 그렇다하더라도 이정도 크기의 석탑을 건축하기는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재원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인데 그만큼 월정사가 지니는 절의 사세가 컸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가 망하고 유교 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하면서 불교를 탄압하게 된다. 고려시대까지 국가 종교로서의 권위를 누렸던 불교는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면서 부패의 상징이 되었고, 조선은 이를 척결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왕들이었던 태조, 태종, 세종 등은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들을 시행하는 한편 국왕 개인의 신앙으로서의 활동을 계속 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오대산의 불교는 전시대보다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이때에 오대산의 중심 사찰이 되었던 곳은 상원사이다.
월정사의 경우는 자료가 그리 많지는 않으나, 몇몇 자료들을 살펴보면 절의 위세가 높은 편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당시의 월정사는 국가 차원에서 숲들을 보호받았으며 근처에 살던 백성들은 절에 비린내가 퍼진다는 이유로 어업활동이 금지되기도 하였었다.
조선 중기의 명종 대에 이르면 조선 불교의 중흥기를 맞게 되는데 이는 문정왕후가 불심이 깊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선종과 교종이 부활되기도 하였으며 국가차원에서 스님을 뽑는 승과 제도도 실시되었다.
그렇지만 16세기 말의 월정사의 모습은 심하게 퇴락하고 절의 기세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천년의 고찰인 월정사가 절의 건물 안에 비가 새고 불상의 얼굴에 이끼가 낄 정도이면 그 상황이 매우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안타까워하여 절의 중건을 책임졌던 이가 바로 사명대사이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명대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사현장을 지휘했다고 하니 월정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음을 느낄 수 있다. 대사는 월정사 중건을 지휘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후에 오대산 사고를 짓는 일도 참여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영조시대와 순조시대에 절에 큰 불이 났었고 조정의 지원을 받아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고 비로소 헌종 대에 다시 대가람의 위세를 회복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불교가 침투하여 한국 불교까지도 병합시키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월정사는 다시 재정적으로 위기를 겪게 된다. 이때에 많은 독지가들이 뜻을 모아 다시 월정사를 일으켰고 월정사는 다시 또다시 그 웅장함을 회복하였다.
3.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
1950년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불행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불행의 화살은 월정사도 피하지 못하였다. 한국전쟁의 피해로 절은 아예 전소가 되고 말았다. 많은 건물들이 불타고 중요한 사찰 문화재도 한줌의 재로 변하여 땅에 스며들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오대산은 북한의 주요 작전 지역 중 하나였고 빨치산이라 불리는 이들이 절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등 절은 큰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혼란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먹구름은 그 기세를 확장시켜만 갔다. 오대산은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주요 격전지로 변했다. 북한 인민군의 점령지가 되기도 하였고 국군의 점령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국군은 절을 불태우기로 결심했다. 사찰 내에 중요한 문화재들은 빼고 절의 문을 떼어냈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불을 지를 수는 없었다. 월정사가 지닌 그 천 년 이상의 귀중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결국 마을의 청년 3명을 시켜 절을 불태웠다. 오대산은 원래의 먹구름과 태우는 연기와 재로 검게 물들었다.
전쟁 이후 월정사는 국가로부터 국군들이 자행한 일들을 고하면서 월정사의 중건을 요청하였다. 탄허대사2)와 만화대사의 노력으로 절의 적광전이 새로 지어지고 대웅전이 새로 지어졌다.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 월정사는 회복과 치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Ⅲ. 마음의 달을 거닐며 완상하다, 월정사의 배치
한반도에서 사찰이라는 단어의 원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인 상가람마(Samgharama)이다. 이 단어는 중국에서는 승가람마라 쓰였는데, 승가는 절의 중을, 람마는 중원을 뜻하는 말이다. 즉 승가람마는 절의 중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를 줄여 가람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절의 배치를 의미한다.
절의 배치는 불교의 세계관을 담으면서도 사찰이 위치하는 지형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찰은 크게 평지가람형, 산지가람형, 석굴가람형으로 나뉘는데, 먼저 평지가람은 수도를 중심으로 평지에 자리잡은 경우이다. 한편 산지가람은 신라 말 풍수지리설과 선종의 영향으로 험준한 지형에 지어졌다보니 가람배치에 있어 자유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속세와는 떨어져 있어 수도생활에 적합한 경우가 많다. 월정사와 상원사가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다.
월정사로 들어가기 전 냇물을 다리를 통해 건너야 한다. 이는 사찰과 속세의 경계선으로 작용하면서, 절에 들어가기 전 일종의 정화의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일주문
금강문(금강루)
사찰의 가람 배치는 불교의 세계관을 따른다. 불교의 세계관은 수미산 우주론으로 말할 수 있다. 수미산 우주론은 불교의 세계에서 가운데에 존재하는 산으로서 신들이 사는 세계이다. 이 수미산의 촤하단부가 바로 일주문이다. 그러므로 일주문은 가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에서는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을 보게 된다. 천왕문은 사천왕이라 하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들이 지키고 있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실질적인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사찰의 가람과 관련하여 천왕문 다음 해탈문도 존재한다. 해탈문은 그 문을 넘으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월정사의 경우 해탈문의 특성상 문의 형태 자체를 갖추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강루의 금강문이 해탈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월광사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
3.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월정사에 관한 고려시대의 문헌기록은 잘 남아있지 않지만 이것을 훌륭히 대체해주는 것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다. 고려초기의 모습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석탑은 국보 제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광전 앞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탑은 상륜부와 탑신부, 그리고 기단부로 이뤄지게 된다. 고려 중기 다층석탑의 대표적인 예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팔각 모양의 2단 기단부 위에 층수를 결정하는 9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그 위에는 상륜부, 즉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 있다.
탑 앞에서는 탑을 향해서 공양을 올리는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이 석조보살좌상은 머리에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오른 무릎은 꿇어 바닥에 대고 왼 무릎은 세워 탑을 향해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들고 공양 올리는 자세로 앉아 있다. 현재 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2009년 재현된 상이며, 고려시대의 조성되었던 상은 보존처리를 하여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이 석조보살좌상은 탑과 함께 국보 제 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4. 수광전(무량수전) / 지장전
월정사의 수광전은 무량수전이라 불리기도 하고, 이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월정사의 수광전은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어서 지장전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5. 개산조각 / 진영각
월정사가 계속해서 중요한 사찰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승려들의 공이 매우 컸다. 위 두 건물은 그런 승려들의 공로를 기리는 건물로서, 개산조각은 자장율사, 진영각은 탄허 스님을 비롯한 월정사의 고승들을 봉안해둔 곳이다.
6. 삼성각
삼성각은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모신 곳으로서, 한국의 민속신앙과 불교가 습합된 경우라 볼 수 있다. 삼성각은 모셔져 있는 신상에 따라 삼신각, 독성각, 칠성각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월정사의 경우는 세 토속신이 모두 봉안되어 있다.
7. 적멸보궁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해놓은 불전이다. 신라의 자장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옮겨온 석존의 사리 일부를 중대 적멸보궁에 봉안하면서 오대산은 성산이 되었다 한다.
특히 이 오대산의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5대 적멸보궁으로 불리운다.
월광사 수광전
오대산 적멸보궁
Ⅴ. 마음의 달은 우리를 비춘다, 월정사
지금까지 월정사의 역사와 가람 배치를 알아보았다. 이 글에서 월정사에서 숨 쉬고 지켜온 이들이 간절하게 진리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대산 전나무 숲으로 가리어진, 이 오랜 시간 다듬어진 보석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주려 한다.
우리가 이 사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사찰의 모습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닮았다는 사실이다. 이 오대산의 사찰은 우리나라의 시대적 특징에 영향을 받은 요소들이 많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불타지만 계속 일어서는 사찰의 모습은 우리 민족의 한(恨)과 얼이 담겨 있다.
신라시대 때의 자장율사로부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월정사의 기반이 갖추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수행을 위한 절로써 속세를 떠난 채 존속되었으며 이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 석탑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생긴 몇몇 화재 사건들로 상처받았던 모습은 우리의 임진왜란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전쟁 당시의 청야전술로 인해 월정사는 화재로 큰 피해가 있었고, 상원사는 한암스님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때의 민족의 아픔을 되새길 수 있었다.
현재 월정사는 그런 아픔의 역사를 딛고 다시금 대가람으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가 가져야 할 비전에 가깝다.
세상에는 많은 거울이 있다.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거울이 될 수 있고 우리가 공부하는 이 역사도 거울로서 우리에게 작용할 수 있다. 자신 안에 거울을 품고 살아야 한다.
월정사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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