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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함경도, 속초 - 속초시립박물관
속초시립박물관·실향민문화촌속초시립박물관은 속초시 노학동에 위치한 시립박물관으로 지하 1층·지상 3층으로 2005년 겨울 개관하였다. 실향민 문화를 복원하고 관광자원화한 실향민문화촌과 발해의 역사를 다룬 발해역사관과 연계하여 조성되어있다. 더해서 속초시립박물관과 발해역사관은 각각 속초의 역사와 문화, 민속에 대해 알 수 있는 유물들과 발해에 대해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그리고 실향민문화촌은 이북 5도 가옥(개성집·평양집·평안도집·황애도집·함경도집)과 아바이 마을의 초기 생활모습을 재현한 피난민 가옥(박송월 가옥·전상수 가옥·공동주택 2동)을 복원하여 조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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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서며
▲속초시립박물관은 실향민들의 몸짓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남하한 이들은 귀향하기에 쉬운 사주일대의 바닷가에 실향민촌을 건설하였다. 그 이후 이곳은 실향민들의 거주지로서 청호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속초는 전쟁 전 이북 통치를 경험한 원주민, 전쟁 중 월남한 실향민들이 같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사연을 간직하고서 살아온 곳 이었다.
그들은 오롯이 살아남기 위하여 모래 둔덕을 일구어 왔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들만의 문화를 조금씩 펼쳐 보이고 있다. 그들만의 몸짓을 몸소 살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번 답사지이다. 여러분들이 속초 실향민 문화촌·시립박물관을 통해 한국 현대사 한 가운데 처한 속초의 ‘실향민’ 정착 과정을, 또한 그 속에서 상실되어온 ‘실향민’ 정체성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시야를 넓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Ⅱ. 청호동 아바이마을
작은 어촌 마을인 속초읍이 시 규모로 급성장한 요인은 1950년 겨울 흥남철수당시 대거 월남한 함경도 주민들의 이주 때문이다. 중공군 참전으로 철수로 함께 부산으로 남하한 피난민들을 제외하고 남은 이들은 자가 목선으로 월남하였다. 그 가운데 속초는 유난히 월남 피난민들이 많이 이주한 지역이었다.
남하한 이들은 속초 모래밭에 판자와 양철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이 현재의 청호동 아바이마을3) 이다. 청호동에 이주한 실향민들에게는 같은 고향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점, 땅 값이 거의 필요 없고 집값이 싸다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특히 정착비용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요인이 가장 중요했다. 그 이유는 청초호를 막아주는 사질 토양의 국유지에 정착하여 모래땅을 주거지로 바꾸기 위해 흙을 직접 가져다 메우면서 피난촌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정착 초기 실향민들을 국가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주거를 마련했다. 백사장에 제대로 된 집을 건설할 수 없었기에 움집이나 소규모 가건물, 판잣집을 만들어 살며 정착했다. 밑 사진의 모습은 속초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재현된 실향민 가옥의 내부 모습이다. 가옥의 구조는 방과 부엌이 나란히 들어서있다. 피난민에서 실향민이 된 청호동 주민들의 속초에서 적응하는 흔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 초기 정착민들은 어업과 관련된 일자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이유는 속초 근해의 풍부한 수산자원과 속초항의 축조로 인해 어업활동이 활발하면서 많은 어선의 수용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실향민들은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어업에 종사하였고, 청호동 아바이마을은 대표적인 어촌 마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속초항을 중심으로 해안가에는 명태와 오징어의 건조장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직접 어로에 참여하는 남자들과 수산물 가공에 종사하는 아낙네들 역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업 이외에도 초기 정착민들 중에서 군속4) 으로 생활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속초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재현된 실향민 가옥의 내부 모습
▲속초 근해에서는 활발하게 어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미군부대 밤에 가서 일하고 아침이믄 나오고 그랬는데. … 주로 뭐, 배에서 하역작업하는 하역물품 그거 작업하고 열차에도 싣고 트럭에도 싣고했는데. … 그래도 거기 가서 혼자서 하루 일하고 나서 그거 받으믄은 한 닷새나 먹을 수 있었어요" 5)
위 구술자6) 에서 나타나듯 군속에는 미군 부대, 또는 국방군 부대의 군속으로 종사하면서 소정의 임금을 받고 생계를 해결했던 사람들 역시 있었다. 군정이 끝난 이후에 실향민들은 다시 어업에 종사하였으며, 이에 따라 속초는 1960년대 어업우위의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속초의 실향민, 월남 1세대들은 함께 동거동락하고 의지하며 남한사회에 정착하였다. 그 중 특히 청호동 ‘아바이마을’은 함경도 출신 월남민이 주민의 70%나 차지하는 ‘또 하나의 함경도’ 가 되었다.
Ⅲ. 잔재 공산주의자 ‘속초 원주민’, 열렬한 반공주의자 ‘속초 월남인’ 그들의 삶.
▲야외에는 속초역을 조성해놓은 공간이 있다. 마당에는 전통놀이 등이 있어 체험하기 좋다
그런데 전쟁 후 남한 정부는 이들을 ‘월북가족9) ’, ‘잔재 공산주의자’로 각인시켰다. 그 이유는 지형적인 특징에서 나타난다. 속초는 지형적으로 태백산맥에 막힌 지역이기 때문에 주로 양양과 원산을 잇는 철도 노선을 통해 평양까지 왕래하였다. 그들의 생활권은 오히려 원산에 가까웠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휴전선이 그어졌음에도 이북에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례들이 많았으며 이들을 모두 월북가족이라 분류 시킨 것이다. 다음은 월북가족의 구술이다.
"여기 사람들은, 여기 사람들을 갔다가 월북이라는 얘기는 거 잘못된 얘기요! …그니까 원산 갔고 평양 갔고, 뭐 함흥 갔고 뭐 이케갔으니까 여기 사람들이 이북에서 이북으로 간 건대 근데 왜 월북이라고 얘기하냐 그거지. … 그 담에 한가지는 여기 38지역이니까 여기 마주대고 싸우던 지역이였는데, 그때는 뭐 전부 이북 쪽이니까 여기 젊은이들이 취업 관계라든가 여기 학교 관계 그런 것들이 있어서 원산이나 평양 쪽으로 가서 공부한 겁니다." 10)
"그래서 저기 아, 그 직장 생활한다던가 군대갈 때만 해도 그 불이익을 당했단말이야. 나 같은 건 이제 가족들이 이제 이북에 집 장가, 저 누나도 시집가고 그랬거든. 나두 이제 그, 그러해 가지고 군대에 갔을 때는 십팔 번이라구서 뺀치카를 돌려놓는 그와 같은 일도 있었고, 그 담에 직장 생활활 때 직장 생활할 때 공무원시험 쳐도 불이익을 당했고..." 11)
본 구술자는 속초가 원래 이북 땅이었으므로 월북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전쟁 전 이지역의 모든 생활권은 원산이었고, 더 큰 도회지는 평양이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학교 진학이나 취업도 일제 강점기부터 모두 원산이나 평양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였다.
특히 박정희 정권 때 월북가족은 연좌제에 걸려 군대에 가서도 고초를 겪었으며, 직장생활이나 공무원 시험도 응시하지 못한 구체적인 사실 역시 이야기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잔재공산주의자’ 라는 꼬리표 역시 따라다녔다. 반공주의가 국시처럼 횡횡하던 그 시기에 공산주의로 낙인찍힌 것은 그들을 평생동안 고역에 겪게 한 것이다.
흔히 월북가족들에게 남한 사회에 대해 살아가는 방식은 ‘침묵하기’ 라고 한다. 이에 반해 자신들의 처지와 대비되는 ‘속초 월남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침묵하는 자신들과는 다르게 월남가족은 여러 행사와 모임도 가지고 있으며 불공정한 정책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다.12)
그들에게 강요된 침묵으로 인해 체제의 불신은 물론 주변의 주민들에게 피해의식으로 나타났다. 월북가족은 재북가족으로 불리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그 단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월북가족들에게 주어진 상황 그리고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면 오히려 ‘재북가족’이라는 용어가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열렬한 반공주의자 ‘속초 월남민’
다음은 속초 월남민이다. 속초월남민들은 앞서 언급하였듯 흥남철수 때 대거 월남하였다. 이들에 대해선 다양한 통념이 존재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들이 반공의 선봉에 서있는 ‘반공전사’들이라는 통념이다. 이러한 통념 하에서 월남민들은 북한의 체제를 견디지 못해 “자유의 품을 찾아” 남한으로 온 이들로 묘사된다. 월남민들은 북한체제로 인해 가족과 이산해야 했던 공산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들로 그려진다.
이러한 이미지와 관련하여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북5도위원회13) 이다. 이북5도청에서 지원하는 사업들은 대부분 반공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교육이나 강좌의 주제도 주로 안보, 반공 관련된 것들이다. 일 년에 한 두 번씩 ‘남북관계와 관련, 흡수통일’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강좌가 진행된다.
어느 구술자의 말처럼 “북쪽에 있는 사람은 다 공산당으로 간주하는 그런 시절14) ”에 월남민들이 ‘공산주의자’의 낙인을 피하고 온전한 남한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공성향을 보이는 것이 유리했다. 월남민들이 월남 후 직면한 시험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월남민들은 피난 과정에서 남한 주민들로부터 빨갱이로 지목당하여 손가락질 받기도 했으며, 빨갱이가 아니라는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심문 과정에서도 곤욕을 겪어야 했다. 빨갱이 혐의와 편견에서 벗어나려면 이북에서 반공활동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거나, 유엔군 점령 당시 준경찰 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증명서를 갖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반공전선에서 활동하는 강력한 증인이 있던가, 정규군에서 복무하던가, 그도 아니면 반공사상을 강하게 내비침으로써(주로 다른 빨갱이를 욕함으로써) 빨갱이 혐의를 벗어야 했다.15) 이렇듯 그들은 철저하게 북의 체제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열렬한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을 잃은, 애타게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이라는 사실이다. 월남민들이 속초에 거주 하고 있는 이유도 곧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소망 하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사람 인생이, 나두 이젠 팔십너이요. 갈데가 다 온 것 같은데, 죽기 전에 돈이나 안구 들어가서 고향땅을 밟았으믄 좋겠는데... 그게 지금 제일 소원이여, 그 거기있는 할머이두 그렇구." 16)
대다수의 월남민은 남한에 정착하여 자리를 잡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들이 새롭게 만든 타향에서 정착하기 위해 현실에 안주했고 최선을 다해 적응했다. 그러나 남겨둔 가족의 그리움은 매우 절실했다. 생사의 여부조차 알 수 없었고, 소식을 접할 수도 없었다. 또한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귀향이 아닌 그저 한번 방문만 했으면 한다. 이것 역시 그들에게 남은 상처가 아닐까 염려된다.
월남민들이 남한 사회에서 가지는 정치적 입장은 ‘반공주의’이다. 하지만 이것은 집단적 차원에 입장이며, 개인의 삶 속에는 아직까지도 처절한 이산의 고통이 남아있다.
Ⅳ. 결론
▲속초시립박물관 1전시관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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