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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첫 발걸음, 조선통신사상륙엄류지지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시모노세키는 조선과 가까운 지역으로 과거 많은 조선통신사들이 머물렀다. ‘조선통신사 상륙 엄류의 땅’이라는 비석이 놓인 곳이 통신사가 처음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곳이다. 그 중,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아카마 신궁에서 머물며 험난한 칸몬해협의 물결이 잔잔해 지기를 기다리며 머물기도 했다. 아미다지 공원은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서의 첫 걸음을 내딛었던 장소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공원 안에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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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첫 발걸음
아카마신궁 입구. 강렬한 붉은색이 시선을 사로잡으며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칸안토쿠 천황을 기리기 위해 1191년, 아카마 신궁을 만들었다. 이 신궁은 붉은 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일본 신화에 나오는 용궁을 묘사한 것이다. 안토쿠 천황이 죽을 때 용궁으로 가자고 했던 전설에 따라 붉은 색상을 사용한 것이다. 칸몬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홍색의 수천문은 아카마 신궁을 상징하며 용궁 신사의 독특한 문이다. 뿐만 아니라 양쪽에 서있는 고마이누(해태)는 입을 벌리고 있으며 이는 수컷으로 복을 불러들인다고 한다.
아카마 신궁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이유는 바로 조선통신사에 있다. 시모노세키는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5현 중 하나이며 일본 열도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으로 많은 조선통신사들이 머물렀다. 조선통신사는 총 11번 시모노세키를 들렀다. ‘조선통신사 상륙 엄류의 땅’이라는 비석이 놓인 곳이 통신사가 처음 일본 땅에 발을 내디딘 곳이다. 그 중,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아카마 신궁에서 머물며 험난한 칸몬해협의 물결이 잔잔해 지기를 기다리며 머물기도 하였다고 한다.
아카마 신궁 입구를 지키고 있는 고마이누
아카마신궁을 들어가는 수천문
아카마 신궁은 19세기에 이름이 바뀌었으며 원래는 아미다지 절이었다. 이 신궁에는 통신사로 온 이성린의 ‘사로승구도’의 일부를 따라 그린 18세기의 시모노세키의 모습과 임수간이 안토쿠 천황을 기리며 쓴 시 등이 보관되어있으며 이는 조선통신사가 시모노세키의 아카마 신궁에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다.
붉은 색의 수천문과 기둥, 그리고 해태와 같은 고마이누 등을 보며 왠지 익숙하기도 하고 색다르기도 하였다. 단지 신사로서 아카마 신궁을 드려다 보는 것 보다, 우리와 관련된 역사를 알고 방문하면 더욱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신사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신궁이 보관하고 있는 역사 자료들을 보고 싶다면 방문 전 미리 문의를 하면 볼 수 있다고 하니 미리 알아보고 가면 좋을 듯하다. 또한 한가지의 팁은 아카마 신궁 앞에 가라토시장이 있는데,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시장에 많은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모이기 때문에 아카마 신궁에도 많이 모이게 된다.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려면 이 날은 피해서 방문하면 된다.
아카마 신궁을 다 관람한 후 약 3분만 걸으면 아미다지 공원이 나온다. 아미다지 공원이 있던 곳은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서의 첫 걸음을 내딛었던 장소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공원 안에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를 세웠다.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는 2001년 8월 25일에 세워졌고 이 날 제막식에는 당시에 시모노세키 중의원을 역임하고 있었던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도 참석했었다. 이 비석이 뜻 깊은 이유 중 하나는 이 비석의 돌이 한국 화강석이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를 세울 당시 야마구치현 지사가 특별히 한국 포천에서 공수해온 화강석이라고 한다.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는 긴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비석의 중앙에는 당시 한일의원연맹 회장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쓴 비문이 크게 적혀있다. 비석의 양 옆으로는 비석을 왜 짓게 되었는지에 대한 건립취지가 왼쪽에는 한국어로 오른쪽에는 일본어로 잘 요약되어 있어서 관광객들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 기념비가 세워진 공원 앞 전망은 탁 트인 바다가 보여서 이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거나 벤치에 앉아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추천한다.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에서 본 전경
여기서 조선통신사와 시모노세키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려 한다. 17세기 중엽 당시 쇄국정책으로 인해 고립되어 있던 일본 은 유일하게 국교를 맺고 있던 조선으로부터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 왕실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이 조선통신사였다. 조선통신사의 전성기 때는 이 교류가 양국의 자존심 재결의 성격도 띄고 있어서 조선은 경상도 지방의 예산을 전부 투입하는 규모였으며, 일본의 조슈 번은 1년의 재정을 다 쓸 정도로 접대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300~500여 명의 조선통신사들은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개월까지 소요되는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조선의 한양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에도 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이 길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도 있었다. 1703년 2월에 파견된 통신사는 쓰시마 도착 직전에 큰 풍랑을 맞아 통신사 일행과 이들을 안내하러 왔던 쓰시마 번의 고위급 인사들이 모두 사망한 안타까운 일이 그 중 하나이다. 정사 이하 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일행의 방일은 국가외교 뿐만 아니라 선진 문화국이었던 조선의 문화 사절로서 세련된 학문, 화려한 예술, 뛰어난 문화를 전하여 문화교류와 친선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일본 국내에서는 통신사들의 행렬을 그린 그림책이 민중들에게 인기리에 판매되었고 통신사들이 오는 날이면 거리에 나가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하듯이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첫 발걸음을 내 딛었던 이 시모노세키에서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의를 재인식함으로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더욱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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