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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구 공원, 타국에서 고국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홍구 공원, 매헌기념관현재 루쉰 공원으로 표기되는 이 장소는 1956년 <광인일기>, <아큐정전> 등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중국의 대표 문학가이자 사상가 루쉰[魯迅]의 묘가 이전되기 전까지, 홍커우 공원[虹口公園] 혹은 홍구 공원으로 불리었다. 상해 중심 시가지에서 북동쪽의 홍커우 구[虹口区]에 위치한 이곳은 약 40만㎡의 거대한 녹지로 조성되어있어, 주변 분주한 도심과는 상반되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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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구 공원, 타국에서 고국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현재 루쉰 공원으로 표기되는 이 장소는 1956년 "광인일기", "아큐정전" 등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중국의 대표 문학가이자 사상가 루쉰[魯迅]의 묘가 이전되기 전까지, 홍커우 공원[虹口公園] 혹은 홍구 공원으로 불리었다. 상해 중심 시가지에서 북동쪽의 홍커우 구[虹口区]에 위치한 이곳은 약 40만m2의 거대한 녹지로 조성되어있어, 주변 분주한 도심과는 상반되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청조 1896년 상하이 공동조계 관청에서 조계 밖에 있던 잉여 농지를 취득하여 처음 조성되었고, 당시에는 홍커우 오락장으로 불리었으며, 1922년 홍커우 공원으로 개칭되었다. 공원의 전경을 관찰하면 개항의 영향으로 상해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원예가에 의해 설계되어 서양식 정원 양식이 돋보이는 이국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넒은 부지와 드문드문 있는 공터에는 생활체육 시설이 잘 설비되어있기에, 휴식과 운동을 즐기는 중국인들로 즐비하다.
잔잔하게 반사되는 풍경이 공원의 여유로움을 더한다
홍구 공원은 루쉰 기념관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독립투사 윤봉길의 의거 장소로서 역사적 가치를 담고 있는데, 공원 안쪽에 윤봉길의사를 기념하는 매헌기념관은 조용히 대한민국의 역사를 현재까지 품고 있다. 내부에는 윤봉길의 유품과 그의 의거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상세히 설명되어있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 광현당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청년기때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식민지배 노예교육에 반감을 갖고 학교를 자퇴하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문하생으로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서당을 졸업한 후 농민 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농민의 무지를 계몽하여 독립의 기초를 만들고자 농촌계몽운동을 직접 전개하였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뻗어나가며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커짐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처참히 유린되는 식민지배의 현실을 자각하였다. 이는 그가 농촌의 부흥보다 민족의 자유가 우선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향한다.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길을 떠나간다.
윤봉길의사가 중국 망명 목적을 밝힌 글, 윤봉길의사 숭모
(중국 칭다오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931.10.18)
윤봉길은 중국 상해에서 거사의 뜻을 품고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며 기회를 물색하다,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에게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김구와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홍구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당일 오전 7시경 윤봉길은 김구에게 “제 시계는 6원짜리고 선생님 것은 2원짜리니 바꿉시다. 저는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시계가 필요 없으니까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그로부터 4시간 뒤, 행사가 진행이 시작되었고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준비했다. 11시 50분 경,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그는 물통 폭탄을 단상 위로 던졌다. 수백번의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그는 명중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폭탄은 정확히 명중하였다. 폭격으로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즉사하고 이외 상당수의 주요인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남은 폭탄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불발로 인해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된다. 그는 일본 헌병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고 1932년 5월 28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동년 12월 19일, 가나자와에서 미간에 총알을 맞고 사망하였다.
그의 일생이 담겨있는 윤봉길 의거현장 기념비
윤봉길의 의거는 백범 김구가 1946년 상해의거 기념식에서 고 윤봉길의 거사는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조선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것이라고 했듯이, 한국인의 독립투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각국의 언론들은 이를 보도하며 의거에 대한 찬양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윤봉길을 공경하는 뜻을 표시했다. 또한 상해의거는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항일전선에 앞장서 나아가게 하였으며, 미국, 하와이 등에 사는 한인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후원을 이어지게 하여 임시정부를 회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상해의거는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된 중국인의 반한감정을 해소시키고,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계기가 되었다. 또, 장제스와 김구의 단독 회담이 성사되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한인 장교를 양성하게 되었다. 그의 의거가 갖는 또 다른 의의는 중국인의 항일정신 고양에도 기여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에서 일본에 패한 중국으로서는 윤봉길과 같은 청년이 나오기를 고대했다. 이에 따라 윤봉길을 중국의 민족영웅이며 상해사변의 순국열사라 칭송하면서 중국에서도 윤봉길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다. 지금까지고 중국에서는 윤봉길을 희생 열사의 한명으로 기리고 있기에, 한중 양국 우호의 초석으로서의 영향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 우리들은 수많은 독립투사들 중 대표격인 인물로 윤봉길을 기억하고, 윤봉길의 결단력, 용기, 그리고 독립에 대한 열망은 홍구 공원을 방문하는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만든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은 식민통치의 역사는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과거의 한 조각일 뿐이기에, 쉽사리 그 당시의 감정을 헤아리기 힘들어 하고, 눈시욹을 붉히는 그 순간들을 그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발한 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에 세월이 흘러 과거와는 다르지만, 역사속의 장소를 방문하여 직접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적어도 홍구 공원에 방문한다면, 매헌기념관에 들어선다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윤봉길 흉상의 눈을 본다면, 평생을 살며 느끼지 못할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윤봉길의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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