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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어촌마을에 들이닥친 개항이라는 풍랑의 흔적을 쫒아서 - 인천개항박물관
인천개항박물관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양무호와 광제호의 흔적,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 호텔과 관련된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첫 번째 우편사업과 최초의 우체부,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인 내리교회, 최초의 사립학교인 영화학당,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월미도 등대까지 온갖 근대 문물의 시발점을 살펴볼 수 있는 곳. 인천개항박물관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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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어촌마을에 들이닥친 개항이라는 풍랑의 흔적을 쫒아서
조선 후기, 평화롭기만 하던 농어촌 제물포에 한바탕 커다란 풍랑이 불어 닥치게 된다.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무역을 하던 이양선들이 인천 일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명나라와 함께 해금정책을 펼치던 조선은 제물포를 해양방어진지로 삼으며 외부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강화도조약/ 조일수호조규)을 맺으면서 1883년 1월부터 지금의 인천항인 재물포를 강제로 개항하게 되었다.
재물포항을 강제로 개항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다. 그는 제물포가 “월미도 부근은 여러 섬으로 둘러싸여 풍랑으로부터 안전한 자연항이며, 제물포와 월미도 사이에 두 길 깊이의 수로가 형성돼있어 간조 시에도 작은 배들이 왕래할 수 있고, 부두와 축항시설의 설치가 용이한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는 점을 들며 지금의 인천항인 제물포항을 개항장으로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 평화롭고 한적하던 어촌마을은 근대 식민도시로, 그리고 국제 항구도시로 급속하게 변모하게 된다.
인천의 개항은 특히 역사, 문화적인 부분에서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기존에는 없었던 종교, 건축, 교육, 음식, 통신, 금융, 풍속 등의 새로운 방식이 인천을 중심으로 도입되고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대적 무역 업무를 처리하는 감리서와 해관이 인천에 설치되기 시작했고, 일본인과 중국인등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인 조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인천 경찰서나 인천 우체국 등 관공서도 생겨나기 시작했고, 다양한 국가의 영사관도 차례차례 설치되었다. 서울에 있던 전환국이 인천항 근처로 옮겨지기도 했으며, 이와 함께 근대식 금융기관인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들어서기도 했다. 선교를 위해 인천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종교 시설을 세우기 시작했고, 뒤이어 관립학교, 사립학교, 그리고 미션학교 등 이전에는 없던 다양한 교육기관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 개항장 일대에는 호텔과 다양한 위락시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천의 변화와 발전을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천개항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양무호와 광제호의 흔적,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 호텔과 관련된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첫 번째 우편사업과 최초의 우체부,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인 내리교회, 최초의 사립학교인 영화학당,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까지 온갖 근대 문물의 시발점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협소하다면 협소할 수 있는 아담한 인천개항박물관 전시실 안에 인천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방대한 양의 온갖 문물들 흔적이 모두 담겨있다는 사실이 돌이켜보니 새삼 놀랍기도 하다.
이화 보통우표
최초의 우체부
영화여자보통학교 졸업증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 팔미도 등대
옛날 인천개항박물관 앞쪽 거리 재현
사실 인천개항박물관은 그 건물 자체만으로도 개항 이후 인천의 역사를 몸소 간직하고 있다. 인천개항박물관 건물은 본래 (일본)제1국립은행 인천지점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은행은 조선에서 나는 금을 사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담긴 건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 건물 안에는 은행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창문, 금고, 그리고 기둥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제1국립은행이었던 당시의 모습도 상상해볼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더 재미난 관람 포인트는 제4 전시실인 옛 금고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상구로 보이는 문이다. 영화에서만 보던 쪽문을 실제로 바라보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하고, 위급한 상황에 꽁무니 빠지게 엉금엉금 기어 도망가는 영화 속 고위 간부들의 모습이 떠올라 웃기기도 했다.
구, 일본제일은행 인천지점 모형
옛 금고 안에 있는 비상구 쪽문
오늘날의 인천은 광역시로 승격되었을 만큼 워낙 큰 대도시이기 때문에, 인천항 일대가 제물포로 불리던 한적한 어촌마을의 모습을 한 인천을 좀처럼 상상해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평화롭기만 하던 어촌마을의 그 어떤 조그마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만약 인천이 당시 일제에 의해 개항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 모든 문물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인천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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