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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맞닿은 건 부산뿐이 아니다 – 학성공원 안의 울산과 일본

울산 학성공원
  • 탐방일시 :2018.08.08
  • 조회수 :1528
  • 좋아요 :0
  • 위치
    울산 중구 학성공원3길 54 학성공원
  • 키워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일본과의 교류, 공원, 울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안에 고즈넉이 솟아오른 학성공원은 공원으로 울산 시민들에게 주는 편의성 못지않게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 울산의 역사가 풍부히 담겨있는 곳이다. 공원의 꽃과 나무에서 박물관의 향이 나는 이곳을 한 번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울산 학성공원 대표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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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면 울산마치(蔚山町)라는 역이 있다. ‘울산(蔚山)마을’의 일본 발음인데,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고 한다. 어찌된 사연일까.

정유재란 때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남부 지역을 휘젓다가 1597년 11월 울산에 진을 쳤다. 그는 추위에 대비하고 전투 거점으로 삼기 위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의 학성동(鶴城洞)에 있는 울산성이다. 성의 완공 직후 이곳에서 정유재란 최대 전투가 벌어졌다. 조·명 연합군 5만 명에 포위돼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그는 구원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절치부심하며 구마모토로 돌아온 그는 울산성 전투를 거울삼아 가장 견고한 성을 쌓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것이 일본 3대 성(城)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이다. 축성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울산 사람이었고, ‘우루산마치’에 터를 잡고 살았을 것이다. 성의 위력은 1877년 발생한 세이난(西南)전쟁 때 확인됐다. 규슈 남부의 사쓰마 번 영주가 이끄는 군대 약 1만3000명에게 52일간 공격을 받았는데도 끄떡없었다. 이를 계기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유명해졌다.

구마모토 시는 울산 사람들이 한때 많이 살았던 그러한 인연 때문일까? 울산시와 자매결연1)한 도시 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이야기 속 등장하는 울산성이 바로 오늘의 학성공원이다.

학성공원은 공업탑과 더불어 울산의 대중교통들이 모이는 환승지 중 하나이며, 울산시의 중앙에 위치한 공원이라는 이름답게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고 있었다. 학성공원의 입구는 도산성(울산성) 전투의 기승전결, 그리고 기마동상, 조명연합군 및 일본군의 당시 모습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어 이곳이 학성공원 이전 일본의 왜성임을 알려주는 듯 했다. [사진 1, 2, 3]

[사진 1] 도산성전투

[사진 1] 도산성전투

[사진 2] 벽화

[사진 2] 벽화

[사진 3] 기마동상

[사진 3] 기마동상

학성공원은 이 공원의 토대가 세워진 임진왜란의 기억, 이곳에 기리는 수많은 비석이자 울산왜성이 학성공원으로 만들어진 일제 강점기의 기억, 그리고 현대 울산광역시 학성공원의 기억으로 나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의 기억은 먼저 학성공원의 내부 구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공원은 당시 문이 생겼던 위치인 삼지환, 이지환, 본환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입구에서 삼지환으로 걸어가는 길목에 우리는 어떤 팻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학성공원에서 멀리 보이는 충의사에 대한 팻말이었다. [사진 4] 충의사는 2000년 건립한 임란 공을 세운 선조들의 충의를 기리는 건물로, 춘추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실제로 팻말에서 먼 산을 바라보면 건물이 보인다. 입구의 울산성 전투와 학성공원의 본환 – 이지환 – 삼지환의 구조가 이곳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만들어 졌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며 이곳은 불태워져 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남겨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가 되어서 이곳은 지금의 형태인 ‘학성공원’으로 정비되기 시작한다. 바로 김홍조라는 사람에 의해서이다. 그는 1913년 이 땅을 사들여 나무와 꽃을 심어 울산시에 기증하려 했으나, 1922년 그 끝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택천에 의해 1927년 울산시에 기증되어 1928년 4월 15일, 현재의 학성‘공원’의 시작이 되었다. 그의 업적을 기려 학성공원 내에는 김홍조 공덕비 [사진 5]가 세워져있다.

[사진 4] 충의사 팻말

[사진 4] 충의사 팻말

[사진 5] 김홍조 공덕비

[사진 5] 김홍조 공덕비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학성공원의 모습은 이 뿐만이 아니다. 서덕출 노래비 [사진 6], 박상진 의사 추모비 [사진 7], 요산대 [사진 8] 또한 일제 강점기 시대 울산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서덕출은 일제 강점기 동요 작가로, 일제의 시달림을 받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노래 가사로 우리에게, 특히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2) 지금도 울산시는 그를 기려 이 노래비를 세우고, 매년 ‘서덕출 봄편지 노래비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노래비는 일제 강점기 그로 인해 꿈과 희망을 되찾은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여 그에게 울산시가 내리는 표창장과도 같아보였다.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에 추대되었고, 만주의 신흥학교 등에 군자금을 보탰던 사람으로, 이후에는 친일부호를 처단하기도 했던 사람으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인물이다.3) 그런 과거를 상징하듯,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공원에 세워진 추모비에는 ‘대한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추모비’가 새겨져있다.

[사진 6] 서덕출 노래비

[사진 6] 서덕출 노래비

[사진 7] 박상진 의사 추모비

[사진 7] 박상진 의사 추모비

정상에 오르면, 요산대라는 이름의 낡은 비석이 세워져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김홍조 씨가 세운 비석으로, 그 뜻은 태화강과 동천, 그리고 삼산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다 보는 넓은 터라는 뜻이다.4) 요산대에서 바라본 울산 전경 [사진 9]은 이곳이 왜 군사적 목적의 왜성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공원으로, 그리고 왜 김홍조씨가 요산대라는 이름을 지어 ‘즐거운 마음을 바라다 보다’라는 뜻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사진 8] 요산대

[사진 8] 요산대

[사진 9] 요산대에서 바라본 울산 전경

[사진 9] 요산대에서 바라본 울산 전경

해방 이후, 울산광역시의 중앙에 위치한 공원으로서도 이곳은 많은 의미가 생겼다. 울산광역시민헌장과 자연보호헌장이 이곳에 있으며, 울산태화사지십이지상 사리탑 또한 이곳에 있었다. 현재는 자리를 옮겨갔고, 대신 그 자리를 기념하는 터가 남았다.

[그림 10] 울산동백과 소녀

[그림 10] 울산동백과 소녀

‘울산동백‘이라는 꽃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역사가 학성공원에는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이 동백꽃은 본디 이곳에 피던 동백꽃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울산이 일본에 넘어가며 오색팔준산춘이라는 이름으로 400년 동안 살았다. 그 것이 임진왜란 발발 400주년이 되던 1992년 울산에 돌아와, 광복 70주년인 2015년에는 본디 있던 학성으로 돌아왔다. 울산시는 이를 기리듯 울산동백과 소녀 [사진 10]라는 이름의 동상과 울산동백이 피는 나무를 보존하고 있다.
부산에 사는 우리는 익히 알지만, 최근 조선통신사를 비롯해 부산과 일본의 교류에 대해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나는 학성공원의 땅부터 여기 세워진 모든 시설들이 일본과 그 영향이 크든 작든 존재한단 점에서, 부산과 일본 사이의 교류사 못지않게 울산과 일본 사이 교류사 역시 다시 조명해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치보기

1) 서울경제 울산시-구마모토시 '400년 앙금' 털고 화해 악수
2) 현지 노래비 기념동판 일부 발췌.
3) 현지 추모비 발췌
4) 현지에 마련된 설명문 발췌
참고문헌
* 한국경제뉴스 <구마모토>
* 서울경제 <울산시-구마모토시 ‘400년 앙금’ 털고 화해 악수>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서덕출>
* 울산저널i <학성공원에서 만나는 울산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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