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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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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킨 통영, 그를 지킬 통영 - 착량묘
착량묘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조 31년(1598)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긴 이 지방 사람들은 그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착량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를 짓고 정성껏 그를 모셔온 것이 이 사당의 시초가 되었다. 착량(鑿梁)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라는 뜻으로 당포해전에서 참패한 왜군들이 쫓겨 달아나다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 좁게 이어진 협곡에 이르러 돌을 파서 다리를 만들며 도망한데서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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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킨 통영, 그를 지킬 통영
착량묘 입구. 여기서 뒤를 돌면 이순신 장군이 평생을 바쳐 지킨 곳이 펼쳐져 있다.
충무공과 통영, 서로의 뜻매김
이순신과 통영은 서로를 정의하는 사이다. 이순신의 호인 ‘충무공’은 통영의 옛 지명인 ‘충무’를 낳았고, ‘통영’은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었던 ‘통제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통영은 충무공이 왜군을 크게 무찔러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는 한산도 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한산도 대첩 덕분에 통영은 배와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 점점 발전하게 되었고 삼도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신기할 정도로 질긴 인연 덕분에 통영에는 충무공과 관련된 곳을 흔하게 찾을 수 있다. 먼저 청동으로 된 충무공의 동상과 거북선 조각을 볼 수 있는 충무공의 이름을 딴 ‘이순신 공원’,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을 가진 통제영의 객사 세병관, 관광객을 모으는 각종 행사가 진행되며 충무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충렬사, 충무공이 임진왜란 때 군사작전을 짜고 군사를 지휘하는 곳이었던 제승당까지. 통영과 이순신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옛날부터 시작된 ‘통영’이라는 지역과 ‘장군’ 충무공의 관계는 어떻게 오늘날까지 끈끈하게 유지되어 올 수 있었을까? 500여 년 동안 그사이를 촘촘하게 메워온 것은 다름 아닌 통영의 ‘사람’들이었다. 착량묘가 세워진 유래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뺏기고 삶의 터전을 잃은 전란 와중에 충무공의 전사 소식을 듣고 언덕 위에 간소하게나마 초가로 사당을 짓고 장군을 모셔왔다고 하는데, 이것만 봐도 통영 사람들이 얼마나 충무공에 대한 애정과 충절이 드높았는가를 알 수 있다. 충무공이 조선을 위하여 죽기 살기로 싸워서 왜군들과의 전투에서 이긴 위대한 장군이기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충해주는, 아니 어쩌면 더 큰 이유일 수도 있는 것은 바로 충무공과 통영 사람들과의 ‘교류’다.
착량묘 1
착량묘 2
그가 견딘 단 하나의 이유, 백성의 안위
사실 충무공은 그가 가진 명성에 비해 과거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 사람이 나중에 이순신이 된다고?”라고 생각될 정도로 의아할 정도다. 과거도 아주 오랜 시도 끝에 합격하여 무인으로 관직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23년간 3번이나 파직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기도 한다. 자신을 시기하던 대신들의 모함과 자신을 믿지 못하던 선조의 박해에도 의지를 꺾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백성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단호한 책임감으로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장수였지만, 주변 사람들을 꼼꼼히 챙기는 부드러움으로 낮은 곳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충무공. 부하의 말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지리와 바다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지역민이나 어부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작은 소리까지도 귀담아듣고 전략에 활용했다. 충무공과 지역민들과의 소통.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현재의 우리나라였다고 해도 해군 제독과 그저 어민에 불과한 지역 사람들이 만날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인데 더군다나 신분제가 공고했던 조선시대에 충무공과 지역민들이 교류했던 적지 않은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존경스러운 마음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충무공과 통영. 그 관계는 마치 어느 한 쪽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굳은 벗 같은 사이였다. 충무공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통영, 그리고 이곳은 충무공의 마음을 이제껏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갈 것이다. 무언가 묵직해지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착량묘를 등지고 돌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이 곳에 도착했을 때 생겨난 의문, 하필 왜 이곳에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을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드높은 그곳에서 훤히 보이는 푸른 통영 앞바다는 충무공이 평생을 피로 지킨, 그의 전부였던 곳인 것이었다. 그곳을 바라보며 눈을 감은 충무공의 마음은 어떠한 빛깔로 물들었던 것일까. 충무공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나의 눈시울이 타오르는 노을빛에 조금씩 붉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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