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OP

도시속의 바다 바다 옆의 도시 해양도시 인문지도

나의 해양도시문화탐방

역사

역사

4.3 70주년, 제주 방문의 해 -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 평화공원
  • 탐방일시 :2018.01.02
  • 조회수 :880
  • 좋아요 :0
  •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
  • 키워드
    제주도, 4·3사건, 평화공원, 백비, 현대사

버스를 타고 제주도를 다니다 보니, 해안 육교에 ‘4.3 70주년 제주 방문의 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1940년대를 직접 겪지도 않았을 뿐더러, 제주도 출신도 아닌 우리가 4.3사건에 대해, 제주도 사람들이 느꼈던 슬픔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문장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다.

4.3 평화공원 대표사진

상세내용보기

버스를 타고 제주도를 다니다 보니, 해안 육교에 "4.3 70주년 제주 방문의 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4.3사건에 대해 언급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1940년대를 직접 겪지도 않았을 뿐더러, 제주도 출신도 아닌 내가 제주도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에 대해 서술하자니 문장 한 마디가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4.3사건을 그저 제주도 안의 일이라고만 한정할 수는 없는 것이고, 지금의 우리 세대도 4.3사건에 대해 무지한 채로 지낼 수 없기 때문에, 4.3 평화공원에 다녀온 내용을 글로 쓰고자 한다.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제주 4.3 평화 기념관(전시실), 제주 4.3 평화교육센터, 위령탑 등이 위치하고 있다. 제주 4.3 평화공원 조성 사업은 제주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1980년대 말 4.3사건 진상 규명 운동에 매진하던 민간 사회단체 등은 진상 규명과 함께 지속적으로 위령 사업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제주도는 1995년 8월 위령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했으며,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후보자는 4.3 특별법 제정을 통한 진상규명, 위령 사업과 함께 보상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4.3 평화공원은 제주 도민의 역사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공간으로서의 성격,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는 아카이브 공간으로서의 성격, 4.3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교육하고, 교훈을 주는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제주 4.3 평화 기념관의 백비

제주 4.3 평화 기념관의 백비

4.3 평화공원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제일 앞에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백비이다. 백비는 비문이 없는 비석을 뜻한다. 아직까지도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4.3사건이기에,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백비가 세워지지도 못 한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비석이기에, 4.3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를 더욱 더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의 정책 실패와 사회적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4.3사건의 도화선이 되는 3.1 발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민은 민·관이 총파업하게 되고, 미군정에서는 총파업에 대응해 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하게 된다. 제주도에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은 제주도민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고문을 일삼았다. 테러와 고문에 시달리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결국 1948년 4월 3일 저항과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보이콧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군 병력을 늘려 강력한 진압 작전을 펼친다.
4.3 사건의 도화선, 3.1 발포 사건의 발발

4.3 사건의 도화선, 3.1 발포 사건의 발발

고립된 섬이었던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고립된 섬이었던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해안선 5km 이내 마을을 제외한 마을을 초토화 시키는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된다.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주민들이 집단적인 죽임을 당했다. 그 당시 제주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성별과 연령을 불구하고, 수많은 주민들이 집단적인 죽임을 당했으나 암울했던 시대에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에 4.3사건에 대해 언급할 수 없었다.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4.3사건은 금기시 되었고, 그 시절의 제주도민들은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 날의 사건을 속으로만 삭였다.
그렇지만 1978년,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이 발표되면서 제주도 내에서만 존재했던 4.3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민주화 시대를 향한 시대의 열망을 바탕으로, 4.3사건의 진실 찾기가 시작된다. 1990년대에는 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되고, 4.3사건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된다. 2003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4.3 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4.3사건 유족들과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2014년에는 4.3사건이 일어난 지 66년 만에, 4월 3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올해는 4.3사건이 70주년을 맞은 해로, 제주도에서는 2018 제주 방문의 해를 선포하고 4.3사건이 전하는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전국화와 세계화에 나선다고 한다.
큐브 형태로  정리한 4.3사건  이후의 과정

큐브 형태로 정리한 4.3사건 이후의 과정

해 질 무렵 4.3 전시관

해 질 무렵 4.3 전시관

해 질 무렵, 4.3사건 전시관을 나오면서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그 당시 복잡했던 정치적인 상황에 휩쓸려 주체적인 힘을 가질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이 슬펐고,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제주도민들의 상황,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인 이념이 얽혀 억울한 죽음을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던 모든 상황이 씁쓸했다. 민주 사회가 발전하면서 잘못된 것은 사과하고 바로 잡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민주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책임감이 크게 와 닿기도 했다.

2018년은 4.3사건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니, 올해 4월 3일은 더욱 더 의미 있는 4월 3일이 되었으면 한다.

위치보기

참고문헌
유홍준(2013),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창비
제주 4.3 평화공원 배부 책자
(알쓸신잡 2 – 5화 북제주 편)
필자소개
필자 얼굴 이미지
  • 김승현
  • 소속 : 일어일문학부
  • 이메일 : ksh**********
댓글0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