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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왜성, 상전벽해를 담(談)다.

안골왜성
  • 탐방일시 :2017.12.28
  • 조회수 :536
  • 좋아요 :0
  •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
  • 키워드
    왜성, 인골왜성, 역사, 임진왜란, 창원

시대착오는 곧 멸망이다. 이미 16세기는 대항해시대였고 무역과 바다의 시대였다. 하지만 조선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했다. 그 과오는 19세기 쇄국정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정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식민지 지배를 초래했다. 인골왜성은 시대를 읽지 못한 지배자를 둔 백성의 한이 응축된 곳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라, 모두 바다를 바라보며 나가는 이때, 해양수산부를 없애는 등 다시 조선의 과오를 반복하려 한다. 우리는 역사라는 거울을 경계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안골왜성 대표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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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왜성, 상전벽해를 담(談)다

미로같이 얽힌 본성의 입구. 공략하기 매우 힘들 것 같다. 호랑이 아가리라는 별명이 딱 맞는 듯하다.

미로같이 얽힌 본성의 입구. 공략하기 매우 힘들 것 같다. 호랑이 아가리라는 별명이 딱 맞는 듯하다.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사대교린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외교정책에 눈이 멀어있던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왕이었던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을 갔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가 싶었지만, 명의 참전과 이순신 장군의 해로 장악으로 전세는 점점 교착상태로 접어 들어갔다. 보급로가 끊긴 왜군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향하지만 관군과 의군의 협력으로 좌절되고, 경상도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왜군은 방어를 목적으로 남해안을 따라 왜성을 쌓게 되었는데, 그 수가 약 30채에 달한다. 그 가운데 안골왜성은 안쪽 골짜기에 있는 포구라는 뜻의 안골포에 세운 왜성이다.

사실 왜성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다. 우리나라에 다른 국가 양식의 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주제이다. 수치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을 보며 다시는 아픈 역사를 겪지 말아야한다는 다짐을 새길 수도 있고, 많은 생각과 교육을 할 수 있는 유적지이다. 그러나 차를 대고 내려 본 이 안골왜성의 관리는 전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주차장은 따로 조성되어있지 않았고, 관광안내소는커녕 그 흔한 브로슈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오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만한 경관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면 본성, 지성을 안내하는 표지판만 휑하니 서있었다. 본성으로 향했다. 지그재그로 얽힌 입구가 나를 맞이했다. 일본인들은 이 입구를 ‘호랑이의 아가리’ 라고 표현했다. 곧 죽으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미로같이 얽힌 입구를 지나 성의 가장 높은 곳, 천수각에 올랐다. 주변의 모든 곳이 다 눈에 담겼다. 우측에는 안골만이 한 눈에 보였고 왜성 뒤쪽에는 험한 육망산이 자리잡고 있어 공략이 거의 불가능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장은 여기에 서서 이 경관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땅이 우리가 점령할 땅이다? 아니면 집에 놔두고 온 가족들 생각? 사령관이 서있던 천수각에 서서 한 인간으로써 왜장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었다.
가덕도와 웅천왜성 사이에는 이미 간척지가 되어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고 무역을 하기 위한 자유무역지대가 되었다. 그야말로 땅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땅이 되는 상전벽해다. 한 편으로는 우스웠다. 임진왜란은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시킨 조선과 명에 대한 일본의 강력한 한 방이다. 명은 해금령, 조선은 교린이라는 명분하에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시켰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무역을 금지하고 상행위를 천한 것으로 여겼던 조선에서 무역을 위해 땅을 메우고 건물을 짓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본성 천수각에서 바라본 간척지. 옛날에는 모두 바다였다.

본성 천수각에서 바라본 간척지. 옛날에는 모두 바다였다.

시대착오는 곧 멸망이다. 이미 16세기는 대항해시대였고 무역과 바다의 시대였다. 하지만 조선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했다. 그 결과는 참혹한 전쟁이었으며, 파괴와 멸망이었다. 그런 과오는 19세기에도 이어져 쇄국정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초래했다. 그 결과는 식민 지배였다. 안골왜성을 건축하는데 약 5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1) 무거운 돌을 나르고 왜군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쌓아올린 이 성은 시대를 읽지 못한 지배자를 둔 백성의 한이 응축된 곳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라, 모두들 바다를 바라보며 나가는 이때에 해양수산부를 없애는 등 다시 조선의 과오를 반복하려 한다. 역사란 거울과 경계를 삼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침략자들이 쌓은 성의 꼭대기에서 우리의 바다를 바라보자, 그리고 다짐하자.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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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panzercho.egloos.com/10491114
참고문헌
http://panzercho.egloos.com/104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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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창열
  • 소속 : 국제지역학부
  • 이메일 : x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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