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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속의 섬, 우도

우도
  • 탐방일시 :2020.10.26 ~ 2020.10.26
  • 조회수 :1211
  • 좋아요 :0
  •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 키워드
    제주도, 우도, 해녀, 우도팔경, 섬 속의 섬

우도는 제주도에 속하지만 본 섬과 또 다른 매력의 역사와 문화로 현재에 이르렀다.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이었고, 일제 강점기 수탈의 대상이던 우도는 현재 아름다운 경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섬 속의 섬 우도를 면밀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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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는 제주시 제주도의 부속도서 중에서 가장 면적이 넓고 현재 인구 1,752명이 거주한다. 이곳은 섬의 형태가 소가 드러누웠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도(牛島)라 불린다. 우도는 한라산의 기생화산인 쇠머리오름은 응회환의 수중 분화구로 해양 환경의 얕은 바다속에서 만들어진 수중 분화 활동의 산물이다. 섬 전체가 하나의 용암대지로 오름이 섬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1) 우도의 역사
‘섬의 서남쪽에 구멍이 있는데 작은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조금 나아가면 배 오륙 척을 감출 만하다. 그 위에는 큰 돌이 집 같은데, 마치 햇빛이 떠서 비치고 별들이 찬연하게 벌여 있는 것 같고 기운이 심히 차고 냉하여 머리털이 쭈뼛한다. 세속에서는 부르기를 신룡(神龍)이 있는 곳이라 부르는데, 7, 8월 사이에는 고기잡이 배가 가지 못한다. 가면 크게 바람이 일어나고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져서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손상시킨다. 그 위에는 닥나무가 많다.{[(1)]}

우도는 제주도의 부속도서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만큼 고려 시대 자료와 조선시대 에서 우도(牛島)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의 우도에 대한 인식과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우도는 말에 관한 내용과 함께 기록된다.
비옥한 대지를 가지고 섬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우도는 국마(國馬)를 사육하기 좋은 조건을 충족해 1697년(숙종 23) 국유목장인 우도장(牛島場)이 설치되었다. ‘우도(牛島) 둘레가 백 리인데 주 동쪽 정의(旌義) 경계에 있다. 사람과 말[馬]이 떠들면 풍우가 일어난다2) 우도에는 사람의 소리만큼 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였음을 알려준다.

△ 목장지도(牧場地圖)

△ 목장지도(牧場地圖)

국마(國馬)로서 얻기 어려운 것은 첫째는 노마(路馬)요, 둘째는 전마(戰馬)요, 셋째는 역마(驛馬)입니다. 조정이 이미 마금(馬禁)을 시설하고서부터 사복시(司僕寺)에서 길들여 키우는 것은 오직 제주도 여러 섬의 말인데, 말의 성질이 잘 놀라고 몹시 사나워서 승여(乘輿)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복시에는 노마가 없습니다. 왕가에서 무력을 숭상하지 않은 지 백 년이 되었습니다. 주(州)나 현(縣)의 백성들도 말을 키우지 않으니 절도사의 전마가 모두 만 필이 차지 못합니다. 봄가을의 대열(大閱)에는 그때마다 말을 빌려서 항오(行伍)를 갖추기 때문에 군중에는 전마가 없습니다.3)

사복시란 조선시대 여마·구목 및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1790년에 작성된 강한집에서 ‘사복시에서 길들여 키우는 것은 제주도 여러 섬의 말인데’라 했듯 조선 후기까지 조정에서 관리하는 목장의 수는 매우 적었다. 한반도의 최남단인 제주도의 부속섬 중 우도가 사복시에 속하는 것은 그 만큼 국마를 기르지 좋은 여건을 지녔음을 증명한다.

‘1823년(순조 23)부터 인근 백성들이 우도 개간을 조정에 요청 제주의 위유 어사(慰諭御史) 조정화(趙庭和)가 복명(復命)하고 별단(別單)을 올려, 우도 목장(牛島牧場)을 백성이 개간하도록 허락할 것과 섬의 남녀가 내지(內地)와 왕래하며 혼인할 수 있게 할 것과 목사(牧使)의 전최(殿最)를 도백으로 하여금 마감하게 할 것과 사신 접대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 등을 아뢰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4) 1823년(순조 23)부터 인근 백성들이 우도 개간을 요청하고 1843년(헌종 9) 봄부터 우도 개간과 이주가 시작된다. 1844년(헌종 10)에 김석린 진사 일행이 우도 동남쪽에 정착한 것이 우도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진다.

(3) 우도의 삶
안타깝게도 우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료에서 찾기 힘들다. 그러나 우도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게 도와준다.

(3-1) 우도의 삶 : 교류
‘하우목동 손씨 가문에 어느 영감님이 전라도 강진에 식량을 사례갔덴 홉니다. 어느 부잿집에 간 식량을 폴아도렌 호난 식량은 폴아줄 수가 있노라 그대신 청을 들어줘사 호겠다고 호니, 그 청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집안에 똘년이 씨집도 안갔는디 애기를 베연 우세를 당호게 되였으니 이 처녀꼬지 제주로 실렁 가민 폴아주켄 호였더랍니다.5)

무곡상인은 18세기 초부터 전국적으로 활동범위를 넓혔고 구전되는 설화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야기의 시작은 최대 18세기로 추정된다. 하동군사에서는 ‘화개장터는 전국 7위안에 손꼽힐 만큼 큰 장이었다는 명성에 걸맞게 전라도, 경상도의 상인들이 장에 모여들었고, 소금을 임산물로 교환하고 장을 둘러보았는데 중국산 비단과 제주도 생선등 다양한 거래물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기록한다.6) 내륙의 수운인 섬진강을 따라 운반된 제주도의 물품은 제주도와 내륙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또한 우도에서 전라도를 방문한설화의 구전은 우도의 사람들이 제주도-내륙 경로를 통해 교류했음을 증명한다.

우도에서 바라본 한라산

우도에서 바라본 한라산

'전라도 지방에서 들어완 사는 성은 조씨고 벨명은 돌패기엔 허는 피쟁이가 이서십주. 무사 돌패기엔 헌 벨명이 붙었는고 허니 쉐를 잡는디 돌로 머릴 찍엉 죽여 노앙 잡낸 허연 조돌패기란 이름이 붙어십주. 그 때문에 1975년꼬지만 허여도 소섬에 사는 사름덜에게 큰 오명을 들러씨우게 된겁주. 인접헌 성산포나 구좌쪽만 가도 조돌패기 닮은 놈이라고 비웃음을 받아왔는디, 이 돌패기가 쉐를 잡으레 뎅길때 꼭 주멩길 두 개를 차집주. 호나는 눈에 잘 보이는 바깥이 차곡, 호나는 못보는 옷 속옵에 차십주.’
1986년 이전까지 우도는 구좌읍 연평리에 속하였음에도 우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본 섬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3-1) 우도의 삶 : 바다에서의 삶
‘만행이 할머니 ’ 설화는 불과 50여년의전의 일으로 실제 목격했다는 이들이 살아있다. 현재의 우리가 들으면 괴상하고 기적과 같은 이야기이지만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던 우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화로써 큰 의미가 있다.
‘미역을 캐기 시작하는 해경(解警)을 며칠 전에 치른 하우목동 바닷가는 온통 미역캐는 해녀들의 인파로 뒤덮였다.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펼쳐지는 해경철의 바닷가는 며칠동안 미역을 캐는 해녀들과 캔 미역을 져 나르는 사람들로 온통 술렁인다. 마치 교향악이 바닷가에 울려 퍼지는 정경이다.’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우도는 해녀들의 물질로 생계를 이어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미역채취는 연중 하는 것이 아니라 금채하였다가 이른 봄에 일제히 작업을 하며,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미역을 캐기 위해서 모여들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들 바닷가로 나왔지만, 만행이 할머니만은 눈에 띄질 않는다. 모두 가쁜 숨을 돌려 쉬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아이고, 큰일 낫수다. 만행이 할망 안 보염싱게" 해녀동아리는 일제히 놀라 일어섰다. <중략> 다들 만행이 할머니는 숨진 줄 알고 체념하고 있을 때, 이건 무슨 변고일까. 할머니는 물위로 불쑥 귀신과도 같이 머리를 내미는 게 아닌가. 모두의 눈은 휘둥그렇게 마주칠 뿐이었다. 만행이 할머니임은 어김없으나, 이건 어쩐 일로 머리가 빡빡 깎여지지 않았는가. 한참 정신을 가다듬더니 할머니는 천천히 그 경위를 털어놓는다. <중략>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온 몸이 찌르르 전율하는 순간, 눈앞에는 느닷없이 놋농지(놋종제기)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놋종지는 자기를 따라오도록 할머니에게 시늉한다. 앞장서서 나가는 놋종지를 따라가야만 될 듯 느껴져서 그냥 그대로 좇아갔다. 눈앞에는 헌칠한 소나무가 드러나고 으리으리한 대문이 나타난다. 웅장한 기와집이 전개되는데, 눈을 부라리며 살펴보니 훌륭한 절이었다. <중략> 염주를 구르는 스님이 의연히 노파를 맞는다. 이곳에 오면 누구든 머리를 깎아야 된다면서 스님은 노파의 머리를 사정없이 깎았다. " 당신은 이곳에 오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어서 사바세계로 되돌아가서 좀 지내다가 다시 오실 것으로 하시오. 썰물인 지금 서둘러서 돌아가시오." 따스한 스님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스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저도 모르는 새에 물 위로 솟아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턱〉에 둘러앉아 그 신비로운 경위를 듣는 해녀들과 동네사람들은 신들린 듯 숨을 죽였다. 분명히 노파의 머리는 깎이었고, 목에도 칼금이 나 있었다. 삭발하던 칼이 빗나가서 생긴 상처인 듯 보였다. 이런 신기한 일도 세상에 다 있단 말인가.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웃마을로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목숨을 걸고 깊은 바닷가에 들어가 물질을 하기 때문에 만행이 할멈처럼 물에서 못 나오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설화에서는 우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소망 그리고 용궁신화와 불교의 결합을 엿볼 수 있다. ‘〈불턱〉에 둘러앉아 그 신비로운 경위를 듣는 해녀들과 동네사람들은 신들린 듯 숨을 죽였다.’ 물질을 통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도 초월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눈앞에는 헌칠한 소나무가 드러나고 으리으리한 대문이 나타난다. 웅장한 기와집이 전개되는데, 눈을 부라리며 살펴보니 훌륭한 절이었다. <중략> 염주를 구르는 스님이 의연히 노파를 맞는다.’ 물 속에 존재하는 웅장한 기와집은 용궁이 당시 시대에 맞추어 각색된 것으로 보이며, 이 곳에서 스님이 등장하는 것은 우도에서 불교와 토속신앙의 결합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3-1) 우도의 삶 : 일제감정기
‘비양동에 살던 공달천이란 분이 있었는데 정갱이에 종기가나서 고치지 못허연 고생을 허는디, 말을 들으난 죽은 사람 뼉따귀 솔앙 그 분고루를 볼르민 좋덴허난 그땐 일제시대난 바당에서 죽은 시체덜이 올라온덴 말이우다.‘
근대 우도의 삶에서 빼고 얘기할 수 없는 시기는 일제감정기이다. 일본의 치하 아래 제주도 해녀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전국 각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런 불합리함에 맞서 일어난 1932년 해녀항쟁은 수백 명의 해녀들이 우도 구좌읍 세화리에 모여 단행한 항일운동이다.
‘우리는 가엾은 제주도의 해녀들 불쌍한 살림살이 세상도 안다. 추운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헤엄치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7) 설치해 놓고 우리의 피와 땀을 작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데로 갈까’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동천진동 포구에 해녀상과 해녀가를 새긴 해녀노래비가 건립되었다.

(3) 우도 팔경
제주안의 또 다른 제주 우도는 8개의 명승으로 유명하다. 명승은 지방지정문화재에 속하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문화재청에서 경치가 뛰어난 지역을 대상으로 지정한다.

우도 2경 야항어범

우도 2경 야항어범

우도 2경 야항어범 2

우도 2경 야항어범 2

제1경 주간명월(晝間明月)은 한낮에 굴 속에서 달을 본다는 뜻이다. 우도 남동쪽 기암절벽 주위에는 여러 개의 해식동굴이 있는데, 맑은 날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 수면에 반사된 태양이 동굴 천정에 비쳐 둥근 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2경 야항어범(夜航漁帆)은 밤 고깃배의 풍경을 일컫는다. 제주도의 향토음식 하나가 멸치국인 만큼 제주도는 신선한 멸치를 자랑한다. 특히, 6~7월이 되면 섬 전 지역에서 조업을 하는 수많은 멸치잡이 어선들의 집어등은 대도시의 야경 못지않다.
제3 천진관산(天津觀山)은 동천진동에서 한라산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우도의 관문인 동천진동에서는 성산 일출봉8)을 비롯해 각종 기생화산을 품고 있는 한라산의 빼어난 절경을 볼 수 있다.

우도 4경, 지두청사

우도 4경, 지두청사

제4경 지두청사(地頭靑莎)는 우두봉에서 천진항 서빈백사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우두봉 꼭대기에서 바라본 우도 전경과 맑고 푸른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눈부시게 빛나는 백사장의 풍경을 통틀어 일컫는다.
제5경 전포망도(前浦望島)는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사이의 앞바다에서 우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성산포항과 우도항을 지나는 배에서 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제6경 후해석벽(後海石壁)운 바다를 등지고 솟아 있는 바위 절벽을 뜻하며 광대코지를 말한다. 이 밑에는 멀리서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만큼 큰 해식동굴이있다.
제7경 동안경굴(東岸鯨窟)은 예전에 거인고래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고래굴이라 불린다. 우도봉 뒷마을의 '검멀레' 해변에 '콧구멍'이라는 2개의 해식동굴이 있다.
제8경 서빈백사(西濱白沙)는 백색의 홍조단괴로 이루어진 흰 모래톱 뜻한다. 산호 백사장이 하얀 빛으로 반짝이는 이 곳에서 바라보는 지미봉의 경치도 유명하다.

(4) 닫는 글
우도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알려지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지닌 장소이다. 2000년대에 들어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며, 이전 본섬에게 받았던 차별은 뒤로하고 많은 이들이 거주를 희망하는 장소가 되었다. 아직도 섬을 방문하면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볼 수 있고 부근 해역에서는 고등어, 갈치, 전복 등이 많이 잡혀 신신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우도 해녀의 발자취

우도 해녀의 발자취

위치보기

1) 승증동국여지승람 38권
2) 승증동국여지승람 38권
3) 강한집 5권
4)조선왕조실록 48집 220면
5) 무곡상 손영감
6)『하동군사』
8)일제시대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해녀어업조합을 거쳐 판매되는데 당시 판매대금의 약 50%이상을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착취했다.
8) 유네스코 세계자연 유산으로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의 다른 오름들과는 달리 마그마가 물속에서 분출하면서 만들어진 수성화산체다.
참고문헌
승증동국여지승람 38권
강한집 5권
조선왕조실록 48집 220면
하동군사
제주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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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시은
  • 소속 : 사학과
  • 이메일 : 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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