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양도시문화탐방
경관
경관
소나무 길과 펼쳐진 바다 - 월송정
월송정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위치한 정자인 월송정은 관동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곳입니다. 먼 과거로는 신라 사선에 관련된 설화부터 가까운 과거로는 항일의병장 신돌석 장군에 관련된 일화까지 많은 이야기가 전하는 장소이자 빼어난 경관을 가진 장소입니다.
상세내용보기
Ⅰ. 월송정 소개
1. 월송정 위치
월송정은 현재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62의 2번지 동해변에 위치한다. 월송정은 관동팔경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또 다른 관동팔경으로 꼽히는 망양정과 함께 현재 경북 울진군에 속한다. 관동팔경에 경상도인 울진이 속해 있는 이유는 지금은 경상북도에 편입되어 있지만, 1914년 지방제도 개편 이전에는 현재의 울진군이 울진현과 평해군으로 나뉘어 다 같이 강원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월송정의 소나무 숲에는 한국 황 씨 시조의 제단원이 같이 위치해 있는데 이는 『여지도서』에 의하면 “신라 때 학사 황락1)과 장군 구대림2)이 중국에서 건너와 월송정 아래로 왔다. (중략) 황락은 북쪽 산 들판에 살았는데, 동쪽 모래언덕에 인공으로 조산을 만들어 풍수상의 결점을 보완하였다. 우리나라 성씨 황 씨의 시조는 이 사람이다.” 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 시조가 정착을 한 곳이 월송정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곳에 제단원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2. 월송정의 역사
고려 시대에 세워진 월송정은 1326년 존무사(存撫使)3) 박숙이 처음 지었다고 한다. 충선왕 시기 안축의 취운루 기문에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월송의 두 정자와 서로 갑을이 될 것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월송사 부근에 창건되었던 것을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관찰사 박원종4)이 중건하였다고도 하며 오랜 세월을 지나 퇴락한 것을 1933년 향인 황만영5) 등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시기에 일본군에 의해 철거당했고 1969년에 재일 교포들이 정자를 새로 지었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아 해체했다. 현재의 월송정은 1980년 7월에 복원된 것으로 현판은 고(故) 최규하 전 대통령의 휘호6)로 되어있다.
월송정이 처음 세워진 고려 시대에는 경치를 감상하는 정자로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왜구의 침입을 살피기 위한 망루로 사용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든 조선 중기에 관찰사 박원종이 새로이 정자로 중건하면서 관동팔경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큰 특징은 금강송 1천 그루와 해송 3만8천 그루로 이루어진 소나무숲 속에 위치해있는데 소나무 숲은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고 월송정에 이르면 소나무 숲 사이에서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다. 현재 월송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 약 86㎡ 규모의 2층 고상누각으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잇고 주심포의 형태이다.
3. 월송정에 관련된 일화
우선 이름에 대한 일화이다. 첫 번째, 1349년 이곡이 쓴 「동유기」7)에는 "소나무 만 그루 가운데 월송정이 있는데 사선(四仙)8)이 유람하다 우연히 이곳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라고 되어있으며. 두 번째, 옛 군지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 네 명의 화랑 사선이 달밤에 송림 속에서 노닐던 곳이라고 하여 월송정이라 불렀으며 세 번째, 어떤 사람이 중국 월(越) 나라 소나무를 가져와 심었다는 설과 네 번째, 밝은 달[月]이 떠올라 소나무 그림자가 비치었다고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 하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온다9). 현재 넘을 월(越)을 칭하는 월송정(越松亭)으로 표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첫 번째 설에서 ‘지나갔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하고 ‘비선월송(飛仙越松: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10)’에서 취했다고 보기도 한다.
다른 일화로는 조선 성종이 당시 국내 명화가로 하여금 팔도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정자를 그려오라 했더니, 그 화공이 영흥의 용흥각과 평해의 월송정을 그려 올렸다 한다. 이에 성종이 용흥각의 연꽃과 버들이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월송정에는 비할 수 없다 하며 월송정의 비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11).
4.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는 찾을 수 없는 월송정
『관동별곡』은 하나가 아닌 두 가지가 존재한다. 1330년 고려 시대에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관동별곡』이 먼저 세상에 나왔고, 후에 1580년 조선 시대에 정철 지은 가사 『관동별곡』이 나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관동별곡』은 후자이다. 이번 답사지인 월송정은 관동팔경에는 속하지만 관동팔경을 담은 가사 『관동별곡』에는 망양정을 마지막으로 하며 월송정은 등장하지 않는 장소이다.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송근(松根)을 베고 누워 풋잠을 얼핏 드니 꿈에 한 사람이
날더러 이르는 말이 그대를 내 모르랴, 상계(上界)에 진선(眞仙)이라“
하지만 『관동별곡』의 4단의 한 구절로 꿈속에서 신선과 더불어 노는 것에 비유하는 내용 중 하나인데 소나무 뿌리를 베고 잔 곳이 월송정이 아닐까하고 추측만 하는 바이다.
Ⅱ.월송정을 다녀간 인물들과 그들의 작품, 임금이 내린 어제시
1. 안축
고려 말의 문신으로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및 명산물에 감탄하여 지은 경기체가 『관동별곡』이 유명하다. 아래는 『관동별곡』 8장 구절12)의 해석이다.
"오십천, 죽서루 그리고 서촌 팔경
취운루와 월송정에 있는 십 리의 푸른 솔
옥피리 불고 가야금 타며, 청아한 노래 부르고 우아한 춤 추며
아, 정다운 손님을 맞고 보내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망사정 위에서 창파 만 리 보노라면
아, 갈매기도 반가워라."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의 저서 『근재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그리고 현재 월송정을 찾아보면 그의 시13)가 걸려있다.
▲월송정에 걸린 안축의 시
2. 이곡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우리에게는 그가 쓴 『죽부인전』이 많이 알려져 있고 이곡의 아들 고려 ‘삼은’ 의 한명 목은 이색이 유명하다. 이곡도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월송정(越松亭)의 시에 차운함(次越松亭詩韻)」14)이다.
“고적을 찾아 추풍 속에서 말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울창하게 그늘진 정자의 소나무를 기꺼이 바라보네.
멋진 경치를 찾고 싶어 몇 년이나 마음을 졸였던가,
도를 묻기 위해 천 리의 양식을 미리 절구질하였네.
한위(漢魏)를 거치면서 부근(斧斤)의 재앙 끊어지니,
낭묘를 감당할 재목으로 기룡(夔龍)에 비견되도다.
난간에 기대어 깨닫지 못하는 사이 오래 침음하니,
졸필이라 만에 하나도 형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네.“
3. 이행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대제학을 지냈다. 호는 기우자, 백암거사이다. 이행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고려에 충성하여 절개를 지킨 신하이다. 고려 사관 당시 이성계를 글로 무고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울진으로 귀양을 갔었는데 그 당시 월송정을 매일 밤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여서 기우자(騎牛子)라는 별호가 생겨났다. 현재 월송정에는 그의 시15)가 걸려있는데 아래와 같다.
▲월송정에 걸린 이행의 시
4. 김시습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 중의 한사람이다. 호는 매월당 유교, 불교 모두를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문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의 저자이다. 아래는 김시습이 월송정을 다녀가 쓴 시이다.
“춘풍이라 따스한 봄날의 월송정이여
푸른 강 맑은 모래 십리나 이어졌네
끝없는 평원에 무한한 생각 일어나는데
불 탄 흔적에 풀색이 그 더욱 푸른 것을“
5. 이산해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다. 동인의 영수로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의 정적이자 경쟁자로 여겨지는 이는 관동별곡을 지은 서인의 영수 정철이다. 이산해는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평해에 중도부처(中途付處)16)되었는데 그 당시 이산해는 월송정이 있는 솔밭에 다락을 짓고 살 정도로 월송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월송정기』라는 글도 남겼는데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솔이 우뚝우뚝 높이 치솟아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몇 만 그루나 되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이 참빗과 같고 그 곧기가 먹줄과 같아, 고개를 젖히면 하늘에 해가 보이지 않고, 다만 보이느니 나무 아래 곱게 깔려 있는 은 부스러기 옥가루와 같은 모래뿐이다.”
이 구절에서 당시의 월송정의 모습을 어떠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으며,
“따스한 봄날 새들이 다투어 지저귈 때면 두건을 젖혀 쓴 채 지팡이를 끌면서 붉은 꽃 푸른 솔 사이를 배회하였고, 태양이 불덩이 같은 여름날 땀이 비오듯 흐를 때면 솔에 기대어 한가로이 졸면서 울릉도 저편으로 정신이 노닐곤 하였다. 그리고 서리가 차갑게 내려 솔방울이 어지러이 떨어지면 성긴 솔가지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희미한 솔바람의 운율을 들을 수 있었으며, 대지가 온통 눈으로 덮이어 솔숲이 만 마리 흰빛 용으로 변하면 구불텅 얽힌 줄기 사이로 구슬 가지 옥잎이 은은히 어리었다. 게다가 솔비늘이 아침 비에 함초롬히 젖고 안개와 이내가 달밤에 가로둘러 있는 경치로 말하자면, 비록 용면거사를 시켜 그리게 하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 방불할 수 있으리요.”
이산해가 사계절 내내 월송정을 찾아다니면서 그 경관을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했는지를 알 수 있다.
6. 신돌석
대한제국 말기의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으로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이후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는 활약을 했다. 신돌석은 소년 시절 월송정에 와 우국(憂國)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누대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잎이 진 나무로 덮인 강토를 탄식한다
남자 나이 열네 살에 무엇을 이루었는가
가을 바람 비껴 감개에 젖는다.“
그는 이전 시대의 다른 문객들이 경관을 즐기며 아름다움에 대해 표현했던 것과 달리 월송정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면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달랬다.
7. 어제시
조선의 왕들은 명승지를 찾아가서 보거나 그것이 힘들면 화가들을 보내어 산수화를 그리게 하여 경관을 즐겼다. 그리고 그 경관의 아름다움을 왕이 직접 어제시를 써서 표현하였는데 월송정에는 숙종의 어제시17)와 정조의 어제시18)가 남아있다 직접 다녀갔는지 아니면 성종처럼 화가의 그림을 보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월송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어제시이다. 정조의 어제시는 현재 월송정에도 걸려있다.
“화랑들이 놀던자취 어디가서 찾을건고
일만그루 푸른솔이 빽빽하여 숲일런데
눈앞가득 흰모래는 백설인양 방불코나
한번올라 바라보매 흥겨웁기 그지없다.“
-숙종-
“정자를 둘러싼 송백은 울울창창한데,
갈라진 나무껍질 세월이 오래도다.
넓고 넓은 푸른 바다는 쉼 없이 출렁이는데,
돛단배는 석양에 무수하게 떠 있구나.“
-정조-
▲조선의 22대왕 정조의 어제시
▲겸재 정선의 「관동팔경도」 中 월송정
8. 월송정을 담은 그림들
그 많은 문객들이 다녀간 월송정에는 시나 글만이 남은 것이 아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화가들도 월송정을 다녀간 뒤 그림을 남겼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강세황, 정충엽 등이 다녀갔다.
겸재의 월송정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정선이 63세 때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 숲을 그림 가운데 배치하고 우측에 아주 세밀하게 월송정을 표현해 놓은 그림이다. 짙푸른 먹으로 소나무의 가지와 잎을 그려 마치 먹구름을 칠해 놓은 것 같다. 이 그림에서는 먹의 번짐을 통해 음의 기운을 강조했다.
필자는 이 그림을 보고 사전답사를 통해 현재의 복원된 월송정과는 많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현재의 복원된 월송정과 같은 경우 그림과 같이 소나무 숲을 지나가는 것은 맞지만 그림처럼 정자에 올랐을 때 탁 트인 바다를 마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서 과거의 월송정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고 아쉬움이 되게 많이 남았다.
월송정을 뒤로 하며
▲월송정에 오르면 넓은 모래사장과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위치보기

이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버튼을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