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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 낳은 천재음악가, 윤이상 - 윤이상 기념관

윤이상기념공원(도천테마파크) & 기념관
  • 탐방일시 :2018.07.27
  • 조회수 :792
  • 좋아요 :0
  • 위치
    경남 통영시 중앙로 27 도천테마공원
  • 키워드
    작곡가, 윤이상, 도천테마파크, 베를린하우스, 클래식

통영이 예향(예술인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여기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곳 중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천재음악가라고 불리는 윤이상을 위한‘윤이상 기념관’과‘윤이상 공원’이다. 여기에 오면 음악을 잘 모르더라도 그를 위한 공간이 왜 통영시내 한복판 넓은 터에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전시물들 속에서 그의 다사다난한 생애를 알아보면서 가슴 찡한 감동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윤이상기념공원 대표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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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 낳은 천재 음악가, 윤이상 - 윤이상 기념관

통영의 중심가인 중앙시장과 동피랑과 같은 곳에서 멀지않은 통영의 시내에 위치한 곳에 한 사람을 위한 기념관과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중심가인데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꽤 크다. 바로 통영을 대표하는 음악가 윤이상을 위한 윤이상 기념관과 공원이다. 윤이상은 통영이 낳은 예술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로 ‘천재음악가’,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 라는 엄청난 수식어들이 붙는 인물이다. 어째서 이런 수식어들이 그를 설명하게 되었는지는 이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난 뒤 알 수 있었다.

윤이상의 생애를 따라서...

이 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윤이상의 흉상이다. 그 뒤에는 그의 연보와 작품목록에 관한 설명글, 그리고 그가 가장 그리워했고 음악적 영감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바다, 통영과 관련된 글이 함께 전시되어있다. 이곳의 연보와 여러 전시물들을 통해 그의 전시관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림 1] 윤이상 기념공원 2층 - 윤이상 기념관의 내부 모습 _윤이상의 흉상과 뒤에있는 연보와 작품목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림 1] 윤이상 기념공원 2층 - 윤이상 기념관의 내부 모습 _윤이상의 흉상과 뒤에있는 연보와 작품목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통영에서 태어났다. 통영은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을 통해 유럽의 신문물과 신문화들이 들어오는 곳 이었다. 8살 때부터 그는 유럽식 교육체계를 갖춘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신문화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특히 음악에 재능을 보였는데, 풍금반주에 맞춰 부르는 창가(唱歌)의 수재였고, 독보력 또한 특출했다고 한다. 열세 살 때는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연주하며 직접 작곡을 했는데, 이때 만든 자신의 음악이 동네 영화관의 음악 연주회에서 우연히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를 꿈꾸었다고 한다. 갤러리에는 이 일화에 관한 그의 회상도 함께 전시되어있다. 사진에 있는 내용을 글로 옮기면 이러하다.

[그림 2] 윤이상의 회상 관련 전시물

[그림 2] 윤이상의 회상 관련 전시물

“그런데 열세 살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 나는 다른 사람이 악보로 그린 것만 불러야하고 연구해야 하나.
왜 내가 스스로 음악을 쓰면 안 되는 걸까. 그래서 나는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영화관이 두 개 있었어요.
당시는 무성영화 시대였지요. 영화 사이의 막간에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아주 익숙한 음악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지만 역시 그랬어요. 내 곡이었던 거예요 ”

-윤이상 회상 중에서-

그가 왜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건내용을 본인이 기억하고 있는 회상 기록이다. 자신이 작곡한 곡이 길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영화관에서 들렸을 때의 그 순간을 상상해보면서 가슴이 콩닥거리는 그의 감정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 사건이 바로 천재음악가 윤이상의 초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생시절에는 오사카로 가서 음악을 공부했는데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근처에 살면서 일본에 억압 받는 조선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서 이후 사회,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항일활동 집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 생활도 하고 석방 이후 다시 반일운동을 도모할 정도로 그 의지가 대단했던 것 같다. 해방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의 예술인이 시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작곡가 정윤주 등 과 ‘민족문화 창출’을 목표로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윤이상은 음악부분을 맡았다. 이 당시 그는 통영의 대부분의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민족정신이 담겨있고, 그렇기에 그가 현재까지 ‘천재음악가’, ‘천재작곡가’라고 불리고 이 자리에 그의 기념관이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1949년에는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고 서울대학교,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하며 한국음악계에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했다. 1956년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을 수상하고서 깊은 공부를 위해 39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약 3년간 파리국립고등음악원과 독일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공부했다. 1959년에는 다름슈타트에서 초연한「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의 성공으로 유럽 현대음악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성공 이후 독일에 좀 더 머무르면서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유럽무대에서 확고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63년에 [사신도]를 보러 북한에 다녀왔다가 1967년 '동베를린 공작단사건1)'에 휘말려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간첩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독일 친구들과 국제 예술인,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독일로 돌아와 독일국적을 취득하고, 1972년에 자신이 졸업한 베를린 음악대학의 교수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1985년 정년퇴직했다. 1972년에는 뭰헨 올림픽대회의 문화행사에서 오페라[심청]의 성공으로 한국의 문화를 전 세계인에게 알리면서 찬사를 받았다.

교육과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2)'을 계기로 해외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한민련(해외한국인민주통일연합)' 유럽본부 의장,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의장 등을 맡아 눈을 감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삶을 헌신했다. 또한 1988년 휴전 중 남한과 북한 정부에 음악으로 분단민족의 화합을 위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안해 1990년에 45년 만에 남북한 음악인들이 함께하는 '범민족음악회3)' 와 '90년 송년통일전통음악회4)' 가 개최되었다. 이후 1995년 11월 3일 베를린 자택에서 78세의 나이로 인류에 명예로운 유산을 남긴 인물을 위한 베를린 가토우의 특별묘지에 잠들었다.

윤이상, 그의 생애를 보고나서

이렇게 생을 마친 그를 위한 공간을 둘러보면서 인상 깊었던 점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세계적인 음악가라 칭송받는 인물이라기에 큰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로 놓인 성공가도만 걸으며 정상에 오르게 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힘들게 정상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오사카에서의 경험이나 동백림 사건 등을 통해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겁내지 않고 음악가로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고 활동했다는 것이다. 특히나 동백림 사건으로 베를린에서 서울까지 납치되어 부인까지 고문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고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의 내면, 고향을 향한 그리움

또 최고의 음악가이자 작곡가로 불리는 그이지만 속에는 항상 떠난 고향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만이 남아있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여러 전시 글들을 통해 그가 통영에서도 특히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이 느껴졌다. [그림 3]의 ‘나의 음악은 고향으로부터’ 전시물을 읽으면서 어릴 적 아버지와 통영바다에서의 추억들, 그때의 모습과 공기, 들려오던 노래 등을 계속해서 회상하며 노래를 썼을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다시는 밟을 수 없는 고향 땅을 가슴에 품고 멀어져가는 작은 기억들을 애써 꺼내어보던 그 그리움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의지와 통영에 대한 사랑은 ‘그 땅에 묻히고 싶어라’라는 글에서 잘 드러났다. 본인의 고향 충무가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충무에서의 정신적인,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귀중하게 지니어 본인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서 평생 작품을 써왔다고 전한다. 또한 “일생동안 목숨을 걸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며, 일을 다 끝낸 뒤 고향으로 돌아가 해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이후에 그 땅에 묻히고 싶다”는 글을 보며 그의 일생을 한번 되짚어보면서 안쓰러웠다. 고향에서의 낚시와 고향땅에 묻히는 것, 이 두 가지가 소원인 그였으나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타지에서 그저 눈을 감은 그였기에 말이다.

[그림 3] 윤이상의 회상- 나의 음악은 고향으로부터

[그림 3] 윤이상의 회상- 나의 음악은 고향으로부터

[그림 4] 윤이상의 회상-그땅에 묻히고 싶어라

[그림 4] 윤이상의 회상-그땅에 묻히고 싶어라

이렇게 현대사에 관련된 인물이기에 최근까지도 논란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정치적인 색이 강하다는 이유로 ‘윤이상 기념관, 기념공원’이 아닌 지역이름을 딴 ‘도천테마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제 제 이름을 되찾았으니 그가 통영을 그리워하고 사랑한 만큼 통영주민들에게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과 더불어 자랑스러운 통영의 예술인으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통영을 방문하는 관광객들도 유명한 관광지인 동피랑이나 중앙시장에 들렀다가 가까운 윤이상 기념관에 잠깐이라도 방문하여 시간을 유익한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본인처럼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더위나 추위를 피하면서라도 잠깐 들려서 필자 본인이 느꼈던 감동들을 느끼길 바란다.
더불어 그가 영면한 그의 베를린 자택은 윤이상의 딸이 기증하여 기념관 뒤편의 ‘베를린 하우스’로 옮겨져 재연되어있고, 그가 타던 차도 함께 전시되어있다. 베를린하우스 내부의 가구들은 모두 그가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보존을 위해 하루에 5명만 신청 받아 들어가 볼 수 있으니 운이 좋은 방문객들은 꼭 들어가 보길 바란다.

[그림 5] 베를린 하우스 전경

[그림 5] 베를린 하우스 전경

[그림 6] 윤이상씨가 직접 타던 차

[그림 6] 윤이상씨가 직접 타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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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이라고도 한다. 1967년 중앙정보부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과거 유럽에 유학했거나 유학 중인 대학교수·유학생·음악가·화가 등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공작단에 포섭되어 58~67년 평양에 가서 북한노동당에 입당한 후,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동베를린을 왕래하며 이적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건국사상 최대의 정보사범사건으로서 관련자 194명에 이르렀다. 피고인 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1967년 6.8 부정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임을 발표하였다.
2)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되어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사건.
3) 1990년 3월,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4) 1990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참고문헌
* 통영시청 http://www.tongyeong.go.kr/00852/00872/00873.web?amode=view&idx=1458
* 통영국제음악재단 http://www.tongyeong.go.kr/tongyeong.web
* 윤이상기념공원 http://www.timf.org/memorial/submain_memorial.do
* 한국관광공사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001011
* 윤이상기념관 안내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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