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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위에서 삶을 이어가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 탐방일시 :2017.10.21
  • 조회수 :1117
  • 좋아요 :0
  • 위치
    부산 서구 아미로 49
  • 키워드
    아미동, 비석마을, 산복도로, 공동묘지, 묘지위의집

최근 부산에서는 ‘산복도로’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장소를 가지고 관광자원화를 시도했습니다. 그 중에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지역에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온 피난민들이 살기 시작해 마을을 만든 곳입니다. 약480만명의 피난민들이 삶을 이어나가고자 일거리가 많았던 부산역 근처의 공동묘지까지 임시천막을 만들었습니다. 전쟁 이후 부산에 정착하게 된 피난민들이 임시로 머물었던 그 곳에 마을을 만들고 삶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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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위에서 삶을 이어가다 –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최근 부산에서는 ‘산복도로’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장소를 가지고 관광자원화를 시작했습니다. 부산역에서 처음 알게 된 산복도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코스로 개발 되어 있었습니다. 잘 몰랐던 부산의 새로운 모습에 관심이 갔고, 먼저 산복도로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산복도로는 ‘산 허리를 지나는 도로’를 뜻하며, 산의 경사지에 개발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평지가 좁고 산지가 많은 부산은 이러한 산복도로가 발달된 곳이기도 합니다. 부산의 산복도로는 해방 이후 귀환한 동포들과 한국전쟁의 피난민, 60년대 경제 개발로 부산으로 이주한 서민층들의 정착지였습니다. 부산시는 이러한 산복도로의 생생한 근·현대사적 모습을 관광 자원화를 시켰고, 서구, 중구, 동구 일대의 산복도로를 따라 운행하는 투어를 진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서구의 감천문화마을, 동구의 168계단 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산복도로 관광지 중에서 많은 유명한 곳이 있지만, 그 중에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마을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아미동에 대해서 알아보니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성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지역에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온 피난민들이 살기 시작해 마을을 만든 곳이었습니다.

구름이보이는전망대에서 본 아미동

구름이보이는전망대에서 본 아미동

개항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부산으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의 수는 많아졌고, 그 세월동안 본국에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1892년 복병산에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생기게 됩니다. 이후 여러 곳에 옮겨 다니던 공동묘지와 화장터는 아미동에 정착하게 됩니다. 현재 아미동 천주교 아파트 근처에 화장터가 있었고, 비석문화마을 자리에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이루어지고, 부산은 그야말로 귀환한 동포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됩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약480만 명의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당시 인구의 10배가 넘는 피난민들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대책이 없었던 피난민들은 판잣집을 지어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도시미관, 위생, 교통난 등을 이유로 피난민들의 판잣집의 철거 계획을 시행하였고, 피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빈번했던 판잣집의 화재를 이유로 보수천 주변, 해안가, 부산진, 초량 등에서 철거를 진행하였습니다.

부산시는 철거민들에게 새로운 이주지를 제안하지만 기존의 도심과 거리가 멀었고, 생계를 유지해야했던 사람들은 기존 도심 주변 산동네인 아미동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밭과 임야였던 산 19번지 대신 묘지였지만 주거공간을 형성하기 쉬웠던 아미동 산 22번지에 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자재가 부족했기에 묘지의 비석들을 주춧돌 삼아 집을 짓고 살며, 현재의 부평시장과 자갈치 시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을 오게 된 피난민들은 임시로 머물 것이라 생각했던 그 곳에 마을을 만들고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마을은 휴전 이후 피난민들만 아니라 경제개발 시기 부산으로 유입된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에도 아미동 비석마을 곳곳에는 공동묘지였던 모습들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도로 나타내어 방문객들이 볼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아미동 산상교회 앞에 내리면 제일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묘지 위에 지어진 집입니다. 묘지 내의 공간은 건축자재가 부족했던 당시에 추위를 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었습니다. 묘지 내 공간 위에 지붕을 얹어 집의 형태를 만들어 사용한 이 집은 앞에는 묘지였던 것을 증명하는 비석이 앞에 놓아져 있습니다. 묘지 위의 집 옆에는 좁은 골목길이 보이는데, 마을 내부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사람 한명이 지나다닐 것 같은 좁은 골목길에는 한 가정집의 가스통이 놓여 있습니다. 가스통 밑의 돌 또한 비석을 놓은 것입니다. 계속 골목길을 가다보면 ‘안심쉼터’가 보입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 사이의 좁은 골목길 때문에 치안이 불안했던 주민들을 위해 만든 곳입니다. 안심쉼터는 축대가 특이한데, 바로 비석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축대를 쌓았던 만큼 많은 수의 비석이 포함되어 있는데, 비문이 새겨진 비석도 있고, 가문의 문양으로 보여 지는 비석도 있습니다.

안심쉼터축대의 비석

안심쉼터축대의 비석

축대의 비석

축대의 비석

또한, 비탈길에 만들어진 마을인 만큼 계단이 많은데, 계단의 축대에서도 비석이 보이고 있습니다. 묘지 위에서 산다는 것이, 죽은 이의 비석을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는 다는 것이 현재로는 상상할 수 없지만, 무서움이 느껴졌을 것이란 마음은 듭니다. 실제로 마을 분들 중에서는 귀신 꿈을 자주 꾸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두려움보다 당장의 먹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그들에게 묘지와 비석은 죽은 이의 것이기 보다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곳이었을 것입니다. 산비탈에 지어진 마을에서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장의 잠 잘 곳만 마련해놓은 곳은 물도 부족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물을 먹기 위해서는 아래 당시 경남도청 현재의 동아대 부민캠퍼스가 위치한 곳까지 가서 공동수도를 이용하거나, 자갈치 시장에서 길러 왔다고 합니다. 등에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이고, 그 경사진 산비탈을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현재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러한 불편함에도 이웃끼리 서로 도와가며 살았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고향에서 왔지만 어려운 처지를 서로 이해해가며 도와가며 한 가족처럼 살았고, 그로 인해 아미동은 인심이 좋은 동네로 여겨졌습니다.

아미동 골목 벽화

아미동 골목 벽화

최민식 작가 사진으로 꾸민 아미동 전경

최민식 작가 사진으로 꾸민 아미동 전경

현재의 아미동은 서구청의 지원으로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골목길 곳곳에 벽화를 그려 놓아 따뜻함이 느껴지는 미관으로 변모하였습니다. 또한 구청과 주민들의 참여로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을 통해 아미문화학습관과 ‘아미맘스’에서 운영 중인 기찻집예술체험장은 아미동의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 아미문화학습관 내에는 아미동을 빛낸 인물 중 한 명인 최민식 작가의 갤러리가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 하고 있습니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는 당시 아미동의 변화상을 지켜보신 분들이 여전히 살고 계십니다. 과거와 현재의 적절한 융화를 통해 아미동은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밝은 미래를 간직한 곳으로 변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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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네이버지식백과 향토문화전자대전, "아미동 사람들과 비석 이야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27179&cid=55783&categoryId=56434
* 정회영,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주거공간 발생 및 변화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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