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도시 장소사전
역사
역사 조선시대
초량왜관 터
중구 일대초량 왜관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 1607년(선조 40) 조성된 두모포 왜관에 이은 네 번째 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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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은 조선, 특히 부산과 일본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지역이다. 초량왜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부산포, 염포, 제포의 삼포를 비롯한 모든 왜관이 임진왜란 때 폐쇄됨을 거쳐 1607년 국교를 재개하면서 부산포를 개항하고, 이에 따라 두모포에 왜관이 들어섰다. (두모포 왜관) 하지만 점차 늘어나는 교역량과 두모포 포구의 얕은 수심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자, 1678년 초량에 신관을 지어 초량왜관으로 모두 옮기게 되었다. 초량왜관 근방은 11만평에 이르는 조선 내 일본의 여러 사무를 전담하는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세워진 일본대사관 또한 초량왜관 내부에 설치될 정도로 일본과의 관계가 짙은 곳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오른쪽 길에는 돌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1 : 돌계단) 이 돌계단 옆 지금은 숙박시설인 곳은 초량왜관의 관수옥,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영사관, 1914년부터 1936년까지 부산부청으로 쓰인 터이다. (사진2 : 관수옥) 지금 이곳은 숙박시설이 되었지만, 그 과거를 증명하듯 이 계단 한편에는 지금은 부산박물관에 있는 약조제찰비 (사진3 : 약조제찰비)의 팻말이 홀로 서 있다. 약조제찰비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만난다는 곳의 특성상, 서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문과 일본어로 쓴 비석이다.
사진1 : 돌계단
사진2 : 대표 관수옥
사진3 : 약조제찰비
약조제찰비
1. 대소사를 막론하고 금표한 정계 밖으로 뛰쳐나와 침범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1. 노부세(路浮稅)[倭債]는 현장에서 잡은 후에는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에 처한다.
1. 개시 때 각방에 숨어 들어가 몰래 서로 매매한 자는 피차 사형에 처한다.
1. 5일 잡물을 들여보낼 때 색리(色吏)·고자(庫子)·소통사(小通事) 등을 일본인들이 일체 끌어내어 구타하지 못하도록 한다.
1. 피차의 범죄인은 모두 왜관 밖에서 형을 집행한다.
왜관에 있는 모든 자는 만약 용무가 있으면 관수에게 보고한 후에 통찰[통행증]을 직접 소지하여야 훈도·별차가 있는 곳에 왕래할 수 있다. 각 조의 제찰을 써서 왜관에 세워 이로써 준수할 규정으로 삼는다. 계해 팔월 일.”1)
용두산 공원의 앞쪽 입구, 관수옥 돌계단을 비롯한 세 곳의 입구가 만나는 곳에는 초량왜관 기념비가 서 있다. (사진4 : 초량왜관 기념비) 이곳은 초량왜관, 용두산 신사 등을 비롯한 일본과의 깊은 역사가 담긴 용두산 일대를 부산시는 (사진5 : 한일우호의 거리 상징 조형물) 한일우호의 거리로 지정하는 한편, 초량왜관 전 시설물의 위치 또한 팻말로 알리고 있다. (사진6 : 초량왜관) 1호선 남포역의 7번 출구로 나와, 직진한다면 관수옥 돌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이곳의 역사를 느낄 수 있으며, 왼쪽으로 간다면 번화가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용두산 공원 정상으로 바로 오를 수 있다.
사진4 : 초량왜관 기념비
사진5 : 한일우호의 거리 상징 조형물
사진6 : 초량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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