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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했던 근대화의 길, 이홍장길에서
이홍장길이홍장길은 회담이 이뤄지던 슌판로에서 그가 머물던 숙소인 인접사와 이어지는 길이다. 그는 회담을 마치면 이 길을 통해 인접사로 향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갈을 그의 이름을 따 이홍장길(리홍장길)이라 지었다. 적대되는 관계인 국가의 대표로 온 이홍장에게 일본에서 다니는 모든 길은 위험의 장소였다. 따라서 큰길을 다니지 않고 숙소와 회의장소를 잇는 샛길을 따라 이동하곤 했다. 하지만 이 길은 결국엔 그가 피습을 당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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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간략한 배경
청나라 양무운동의 주역인 이홍장. 그는 톈진조약을 맺은 지 10년만인 1895년에 이토 히로부미와 다시 조우하게 된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가 천진까지 가서 조약을 맺은 것에 비해 확연히 강세가 약해진 청나라의 모습이 보인다. 청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홍장은 시모노세키까지 와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게 되고, 이로 인해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간섭은 더욱 정당화된다.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는 한편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요동(랴오둥) 반도와 펑후 제도를 할양한다. 그가 시모노세키에서 이러한 불평등 조약을 재현한 곳이 일청강화기념관이다. 보통 청일강화조약으로 이름이 익숙하지만, 일본에서는 자국인 ‘일’을 먼저 표기해두었다. 그리고 바로 옆 조약 체결이 이루어진 슌판로와 이홍장길이 이어져 있다. 이 강압적인 조약의 장소에서 조선이 설 자리는 없었다. 조약의 전과 후를 살펴보아도 양국은 조선을 정치적 이용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역사에 대한 평가와 의의는 다를 수 있음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Ⅱ. 이홍장(리훙장)의 생애
청나라 후기의 관리이자 정치가로 당시 주요 외교문제를 장악하는 핵심인물이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열강들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양보·타협정책을 취했다. 본명은 장동(章銅)이고, 자는 점보(漸甫), 자불(子黻)이며, 호는 소전(少荃), 의수(儀叟), 성심(省心)이다.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인했고, 청 · 러밀약, 베이징조약 등에 관여했다. 근대공업 진흥을 위해 노력했고 조선 내정과 외교에 관여했다.
1862년에는 증국번의 추천으로 장쑤(江蘇)순무로 발탁되어 사병인 회군을 거느리고 상하이를 방위하는 등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863년에 장쑤성 쑤저우(蘇州)를 공격하여 회복하고 1864년에는 태평천국의 근거지인 난징(南京)을 공략하여, 12년 동안 이어졌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공훈을 세웠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을 통해 청나라에서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북양군을 직접 지휘 하에 두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로인해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할 때 휘하에 두었던 회군과 영국, 러시아 등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1863년 외국어 학교 설립, 1867년 병기창(兵器廠) 창설, 육해군 편성, 유학생 파견 등을 시행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군사 무기를 개발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앞당기고자 노력했다. 또한 군사강국을 이루기 위해 처음으로 근대화한 해군인 북양수사(北洋水師, 북양해군(北洋海軍))를 창설하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휘하인 양무파(洋務派) 관료의 지배하에 두었다. 안으로는 화북(華北)의 농민반란진압을 위하여 활약하고 청말의 주요 외교문제를 거의 혼자서 장악하였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린다)라는 전통적 수단에 의하여 열강들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일관적인 양보·타협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황해해전에서 일본 해군에 패하여 권력 기반이었던 북양해군을 잃었으며, 평양전투에서도 패해 자신이 양성했던 회군을 잃었다.
그의 권력기반이었던 북양해군과 회군을 잃게 되고, 1895년 전권대사로서 군비 배상과 영토를 제공하는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인하였다. 1896년 청·러 밀약, 1900년 베이징조약(의화단 사건 진압 후 열강과 맺은 조약] 등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고, 쇠퇴해 가는 청나라 국력강화정책으로서 근대공업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보다 앞서 1882년 조선에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게 하고, 묄렌도르프·데니 등 외국인 고문을 보내는 등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관여하였다. 1898년 황하 치수 임무를 맡았으며 양광총독이 되었다. 외교 책임자로서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막아내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청나라는 더욱 쇠퇴해갔다.
Ⅲ. 이홍장이 걷던 샛길
담 너머로 보이는 시모노세키 바다의 수평선
담 왼쪽에 있는 일청강화기념관 이 담을 등지면 맞은편으로 이홍장길이 보인다.
이홍장길을 가기 위해 조선통신사 기념비가 있는 곳을 지나 길을 건넜다. 아카마 신궁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슌판로(춘범루)가 보인다. 슌판로는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지정한 장소인 유명 복어 요리집이라고 한다. 실제로 시모노세키는 마스코트가 복어인 만큼 복어에 대한 애착이 깊다. 거리 곳곳에서 복어인형과 복어 모양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슌판로 옆에는 두 개의 흉상이 나란히 있는데, 당시 조약을 주도하던 이토 히로부미와 무츠 무네미츠 이다. 그리고 슌판로 앞으로 당시 체결을 재현하고 있는 일청강화기념관이 있다. 높은 담장이 둘러싸여진 이 곳 너머로 시모노세키 바다의 수평선이 잘 보이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담을 등지고 서면 보이는 길이 바로 이홍장 길이다.
우선 생각보다 너무 짧은 길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생각보다 깔끔한 포장도로여서 다시 한 번 의외였다.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 있었던 길을 작은 안내 문구 하나로 보존하고 있는 일본 특유의 감성이 느껴졌다. 더불어 청나라 후기의 역사를 이끌던 인물이 한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개혁 추진에 뒤처지면서, 신식기술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서 나가버린 일본을 둘러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패로 물든 본국과 비교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를 그냥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게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홍장길은 낮은 오르막이었다. S자로 크게 돌면 끝이었다. 이 길은 회담이 이뤄지던 슌판로에서 그가 머물던 숙소인 인접사와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는 회담을 마치면 이 길을 통해 인접사로 향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이홍장길(리홍장길)이라고 불리고 있다. 적대되는 관계인 국가의 대표로 온 이홍장. 그에게 있어 일본에서 다니는 모든 길은 위험의 장소였다. 늘 위험이 따랐기에 큰길을 다니지 않고 숙소와 회의장소를 잇는 샛길을 따라 이동하게 된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엔 별 것 없어 보이는 이 길이 아직까지도 이홍장길로 지칭되며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 길은 결국엔 그가 피습을 당하는 길이 되고 만다.
Ⅳ. 회담의 전개와 피습장소
1895년 3월 19일 이홍장은 시모노세키에 도착한다. 3월 20일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제1차 회담이 시작된다. 이튿날 2차 회담이 이어지는데, 그 의제는 역시나 휴전이었다. 이후 24일 3차 회담에서 이홍장은 강화문제 논의에 대해 제안했고 이토는 다음날 강화조건을 제시하겠다고 한다.
이홍장길의 시작점 안내문
이홍장길, 정말 짧았다.
회담 후 이홍장은 숙소인 인접사로 향하기 위해 이홍장길로 접어들었다. 이홍장이 탄 가마가 모퉁이를 막 돌 때, 갑자기 괴한 한 명이 달려들어 권총을 발사했다. 탄환은 이홍장의 오니쪽 광대 뼈 아래를 깊숙이 뚫어 눈 밑에 박히게 된다. 총탄이 금테 안경에 맞은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저격범은 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삼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26세의 극우주의자였다. 때문에 회담을 하고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청의 대표 이홍장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외신들의 집중을 받기 시작한다. 일본은 이를 의식해서 조금은 수그러든 모습을 보인다. 4월 10일 이홍장이 회담장에 다시 나오게 된다. 이후 논의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4월 17일 제 7차 회담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된다. 하지만 조약 체결 6일 후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이 시작된다. 일본에 요동반도를 포기하도록 압박을 가한 것. 일본은 저항하고자 했으나 세 나라를 상대로 하기엔 무리였고, 결국 5월 5일 요동반도 반환에 동의한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고종은 친러로 돌아서게 된다. 이는 다시 일본이 군사력을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짧은 길이었지만, 이 길이 만든 역사적 흐름은 전혀 짧지 않았다. 이홍장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길이지만, 동시에 청일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약의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여전히 힘이 없었고, 두 나라의 전쟁을 마무리 짓는 조약에 조선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마음 아팠다.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이 고개를 숙이고 요동반도를 반환하자 어떻게든 마지막 끈을 잡으려고 당장 러시아 뒤로 숨어야 했던 상황까지 이어졌기에 마냥 마음 편하게만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이홍장이라는 사람 자체만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그 또한 패전국의 대표로 와야 하는 심정이 처참했으리라 생각되지만, 우리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어쨌든 그 또한 조선을 압박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또 마냥 슬픈 눈으로만 그 길을 바라볼 수 없었다. 역사란 이렇게 어려웠다. 어느 입장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Ⅴ. 견학을 하면서
이홍장길에서 내려오며. 여전히 바다가 보인다. 패전국의 대표로 온 그가 피습의 위험을 느끼며 다닌 길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질지 알았을까.
시모노세키와 부산은 모두 해양 도시로서 각각의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되돌아보며 때로는 호의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변하는 양국의 관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바다는 두 나라를 잇는 통로였으며 교류의 장이자 전쟁의 터가 되기도 했다. 단순히 유적지를 보고 관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라는 자연 위에서 인간은 어떠한 역사를 펼쳐내었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국가와 국가를 잇고 있었고, 넘실거리는 파도에서 우리는 아직도 연약했고 무지한 것도 많았다. 역사를 이대로 흘려보낼 것인지, 혹은 개선해나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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