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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작가 허균과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문인 허난설헌, 두 남매의 이야기 -허균허난설헌기념관
허균허난설헌기념관홍길동전의 작가 허균과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문인이었던 허난설헌은 남매이다. 설명하는 글만 봐도 둘의 글 솜씨는 조선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둘의 글은 아직까지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후세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과 남아있는 허균허난설헌생가터는 그들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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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허난설헌생가에 가기 전, 그들의 일생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갔다. 허균과 허난설헌 둘 다 뛰어난 문장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들 중 둘 이었다. 먼저,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이이다. 그녀는 27세라는 어린나이에 생을 거두었지만 그녀가 쓴 시는 200수가 넘는다.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평범한 여인이라서 공부를 따로 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어깨너머로 시를 배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문장력과 표현력은 대단했다. “몽유광상산” 이라는 시를 대표적으로 소개하겠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여기서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자신이 생을 마감한 나이와 같아서 아마 그녀가 죽기 전에 쓴 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시를 보면서 글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시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허난설헌은 불행한 삶은 시집을 간 뒤부터인 것 같다. 그녀는 15살에 어른들이 정해준 집안에 시집을 가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이를 유산하는 등 불행한 일들이 겹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그녀가 이른 생을 마감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유추해본다.
허난설헌이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불에 태우라고 했다. 그래서 그 때 많은 그녀의 작품들이 불에 타 없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동생인 허균은 그녀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녀가 친정에 남겨둔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서 “난설헌집”을 내었다. 이 “난설헌집”은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에게 읽게 하였다. 많은 명나라 사신들이 그녀의 시를 보고 감탄하며 감탄한 것에 모자라 이를 명나라로 들고 가 명나라에서 다시 “허난설헌집”을 내었다. 그녀의 시는 명나라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모두 그녀의 문장력에 감탄하며 칭찬을 하였다고한다. 그리고 일본으로도 전해져서 일본에서도 그녀의 시는 인정받아졌으며 거기서도 그녀의 시를 발간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그녀의 현생은 불행했을지라도 사후 먼 훗날 지금까지 그녀의 일생을 안타까워하고 그녀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직접 이러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고 더 많은 재능을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었다.
허난설헌 동상
허균 영정
사전조사를 끝낸 뒤 허균허난설헌생가에 갔다. 허균허난설헌생가에 가기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 하나가 있었는데 강릉의 거의 모든 버스가 경포호를 둘러서 가기 때문에 시간이 배로 걸렸지만 강릉을 버스투어로 충분히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의 일생에 대해 알아보며 지금 가는 곳에서 그들의 어떤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지 기대하며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에 도착을 했다. 전에 들린 오죽헌과 같이 건물들이 크고 연결되어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갔었는데 기념공원에 도착을 했을 땐 오죽헌과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공원답게 다양한 꽃들과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었던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특히 산책로를 걸으면서 그들이 밟았고 자라온 땅이라고 생각하니까 걸을 때마다 그들의 성장에 따라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의 불행한 삶에 대해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하고 좋은 곳이었지만 결코 잊은 상태로 걷지는 않았다.
소나무들이 울창한 산책로
허균허난설헌기념관 산책로
허균허난설헌생가, 기념관 주변은 공원처럼 되어 있어서 걸으면서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의 분위기는 한적하고 소박했으며, 사람들이 와서 충분히 그 느낌을 받으며 걸을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소나무들이 울창한 길을 허균허난설헌의 생가터에 가까워지는 느낌으로 기대를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은 조선의 불행했던 남매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라서 더욱 의미가 큰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에서는 비운의 당대 최고의 글쓰기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을 지금까지 기념하고 널리 알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1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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