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에는 200여 개의 나라, 70억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그들은 서로 문화와 언어가 다르다. 전 세계에는 약 7000여 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모든 언어를 다 문자로 나타낼 수는 없다. 수천 개의 언어는 존재하지만 그 언어를 글로 나타낼 수 있는 문자는 많지 않다. 그래서 한 가지의 문자로 여러 언어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필리핀의 따갈로그어의 표기를 알파벳으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각 민족의 고유의 문자를 가진 경우가 많지 않지만, 동아시아 3국의 경우는 고유문자를 가진 특이한 경우이다. 그 중 우리의 한글은 글자의 형성시기와 형성원리를 밝힌 과학적인 글자이다.
한글은 우리말을 표현하는 우리글로 1446년에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명칭은 '한글'이 아니었다. 우리의 글은 언제부터 '한글'이었을까? 또한 우리는 우리의 한글을 쓸 수 없었던 적이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 때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식민지였던 우리 민족에게 우리글과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의 문화를 소멸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소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아프면 나오는 ‘아야’ 대신 일본어로 ‘이따이’를 사용하게 한 일도 있었다. 현재의 우리말과 글 대신 일본어를 사용한다면 어떻겠는가? 35년간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의 글과 말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외솔 최현배선생의 자필
언제부터 ‘한글’이라 불렀을까?
외솔 최현배선생
세종대왕께서 1446년에 창제 하시어 수백 년을 거치며, 우리의 글이 된 한글은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언문’, ‘국문’, ‘조선글’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러졌던 한글은 1910년대 근대화 과정 속에서 주시경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에 의해 ‘한글’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한글’의 뜻은 ‘큰 글’이란 의미로, 여기서 ‘한’이 우리말로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한글학자들에 의해 ‘큰 글’이란 이름을 갖게 된 우리글자 한글은 일제강점기 격동의 시기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많은 한글학자들이 일본의 우리글 말살 정책 속에서 한글을 지키려 많은 일을 하셨다. 그 중 외솔 최현배선생의 이야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사형집행일 3일전 광복
외솔 최현배선생은 평생을 한글을 위해 사신 분이다. 한글과 그의 인연은 주시경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보성학교 안의 국어강습원에 나간 외솔선생은 그 곳에서 강의를 하던 주시경선생의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말씀에 크게 영향을 받아 한글을 보급하고 지키는 일에 일생을 바치게 된다. 외솔선생은 일본이 통합이라는 명목아래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소멸시키는 행태에 우리말과 글을 잃지 않게 하는 것으로 대항하였다.
그러한 외솔선생을 일제는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당시 국외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하고, 국내에서 항일활동을 펼치던 ‘흥업구락부 ’사건에 관련이 없던 외솔선생을 연루시켜 석 달의 악독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였던 외솔선생은 강제 해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평생 학자로, 교육자로 살아온 외솔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훈민정음에 관한 이론적 문제와 역사적 문제를 다룬 연구서인 ‘한글갈’을 간행하여 한글의 근본적인 초석을 다져 놓았다. 이후에도 한글에 관한 여러 서적을 간행하여, 우리말의 유지와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외솔선생의 한글 사랑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면서 더 깊어진다.
외솔 선생은 1929년에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우리말 큰 사전』을 만들려 하였다. 그러다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발행하려 하자,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이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 하여 11명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징역을 내린다. 외솔선생도 징역형을 받았고, 옥살이를 하던 3년째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때 감옥에서 나온 외솔선생은 경악할 이야기를 들었다. 광복을 맞이한 8월 15일의 3일 뒤인 8월 18일이 자신의 사형집행일이었단 사실을 들은 외솔선생은 광복이 없었다면 자신은 죽음 목숨이었으나, 나라의 광복으로 나의 목숨을 부지했다는 생각에 이후의 삶은 덤으로 얻은 삶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저 운이 좋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나라에 대한 마음이 깊어졌던 외솔선생은 이후 한글을 위한 행보는 더욱 넓혀나갔다.
흥업구락부사건이 실린 신문기사
문명국으로의 발걸음
한글타자기
외솔선생은 우리말을 단순히 지키고 보존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해방직후부터는 35년간 지속된 일본식 교육이 아닌 우리 민족의 교육을 위한 각종 교과서 편찬에 주력하였고, 기존 세로쓰기 방식에서 옥중 생활 동안 연구하였던 한글 가로쓰기 방식으로 한글의 쓰기방식을 변화하였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의 쓰기방식이다. 또한 한글을 ‘하ㄴ그ㄹ’과 같이 풀어쓰는 방안을 생각해 미국의 알파벳처럼 타자기에서도 쓸 수 있게 하였다. 외솔선생은 한글을 기계화 시켜야 고도화 되는 문명에서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처럼 타자기소리가 나야 진짜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한글의 기계화에 많은 공을 들였다. 한글의 기계화에 먼저 한글타자기 자판의 시안을 발표하고, 한글타자기의 자판을 통일 시켰다. 현재 우리가 쓰는 컴퓨터 키보드 자판의 배열형식이 바로 외솔선생이 만든 배열 형식이다. 자음과 모음의 양분화 하여, 쓰는 이로 하여금 좀 더 쉽게 자판을 치도록 하였다.
외솔선생의 업적을 모두 나열하려면 그 끝이 없을 듯하다. 오죽하면 선생께서 한글에 대한 책을 하도 간행하여 그의 아들이 출판사를 차릴 정도였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글이 대단히 과학적인 글이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말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게 한 세종대왕의 애민사상에 대한 과학적 업적은 온 국민이 알고 있다. 창제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시절 민족의 정신을 지켜내고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업적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각 언어에는 그들만의 문화와 민족적 정신이 담겨 있다. 우리의 문화와 민족정신을 지켜낸 한글학자들의 노고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