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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 -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 평화공원
  • 탐방일시 :2017.11.14
  • 조회수 :1333
  • 좋아요 :0
  •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
  • 키워드
    제주도, 4.3사건, 평화공원, 역사, 봉개동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스라엘 독립 기념관에 쓰인 이 글귀가 생각나는 장소이다. 참혹하고 비참했던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주 4.3 평화공원.
이곳에서 우리가 몰랐던 제주의 아픔을 이해하고 평화와 인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제주 4.3 평화 기념관의 전시를 관람하고 한라산 자락에 넓게 펼쳐진 공원에서 4.3의 아픔을 표현한 아트워크, 조형물, 위령탑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제주평화공원 전시관외관

상세내용보기

제주 4.3 평화공원은 4.3 희생자를 추모하고 위로하면서 평화, 인권 교육의 장으로서 후세대에 역사적 교훈을 물려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4.3평화공원의 초입에는 '비설'이라는 조각상이 높여있습니다. 토벌작정 당시 젖먹이 딸을 데리고 피신을 하던 변병옥 모녀가 피신도중 총에 맞아 희생당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조각상입니다. 이 '비설'은 무자비하게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던 4.3사건을 잘 보여주는 조형물입니다. 공원 외부에는 '비설' 외에도 여러 조형물이 있습니다. 4.3 사건 희생자 중 육지의 형무소로 끌려가 총살되어 암매장당해 시신을 찾을 수 없는, 행방불명된 분들을 기리는 '행방불명인 표석', 발굴되어진 유해를 봉인한 '4.3 유해봉안관'등이 푸른 공원 사이사이로 곳곳에 위치해있습니다.

제주4.3평화공원_전시관외관

제주4.3평화공원_전시관외관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제주도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4.3 사건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과정으로 진행이 되어졌는지 생소할 것입니다. 4.3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전시가 진행되어지는 제주4.3평화 기념관에서는 상설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평화공원에 방문하신다면 꼭 기념관을 찾아 제주의 아픔을 기억하고 추모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과정

제주 4.3사건의 전체적인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해방 이후 제주는 자치적으로 도를 운영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 1일 6명의 도민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민심은 악화됩니다. 이 사건의 해명과 적절한 처벌을 위해 3월 10일 민, 관 총파업을 실시했고 총파업 이후 제주도는 '빨갱이섬'이라는 낙인이 찍혀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제주4.3평화공원_4.3사건의 도화선, 3.1 발포사건 발발

제주4.3평화공원_4.3사건의 도화선, 3.1 발포사건 발발

제주4.3평화공원_경찰발포에 3.10총파업으로 항의

제주4.3평화공원_경찰발포에 3.10총파업으로 항의

낙인이 찍힌 후 제주도의 고위관리들은 극우성향의 인물들로 교체되었고 수많은 경찰병력들이 제주도로 들어오게 됩니다. 총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고문당했고 파견온 서청당원들은 테러를 일삼았습니다. 이 시기에 남한 단독 선거가 확실해지면서 한반도의 분단을 막기 위한 총 파업이 있었고 무자비한 탄압은 더 심해졌습니다. 서청대원,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 선거 반대를 주장하면서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는 4.3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5.10 총 선거에서 제주의 2개 선거구가 유일하게 투표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습니다. 선거 거부를 미군정에 대한 도발이라고 판단하고 미군정은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명령했습니다.

제주4.3평화공원_제주도민 선거 날 산에 오르다.

제주4.3평화공원_제주도민 선거 날 산에 오르다.

제주4.3평화공원_제주, 초토와작전으로 붉게 물들다.

제주4.3평화공원_제주, 초토와작전으로 붉게 물들다.

11월 17일, 제주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역을 통행하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보고가 내려왔고 일명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처 대피를 하지 못한 병자, 노인, 어린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심지어 해안선 부근으로 도피해온 사람들도 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총살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오히려 사람들은 두려움에 도피 입산을 선택했고 이것은 더 큰 인명피해와 학살의 장기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초토화 작전'은 잔혹한 집단 살상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 1950년 5.10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루어졌고 무장대는 사실상 해체되었습니다. 제주의 봄이 오는 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 입산자 가족, 요시찰자 등이 명백한 근거 없이 모두 구속되어 전국의 형무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무자비하게 총살당하고 암매장당해 현재까지 시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행방불명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조성물이 위에서 설명한 '행방불명인의 표석'입니다.

1954년 9월 21일이 되어서야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되면서 7년 7개월간의 고통의 막이 내려졌습니다. 4.3사건은 끝이 났지만 제주 도민들은 연좌제, 국가보안법, 트라우마로 여전히 고통 받았습니다. 독재정권까지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되었지만 '순이삼촌'을 계기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그 이후 1998년 '제주 4.3사태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특별법까지 제정되었습니다. 진상조사가 끝나고 4.3사건이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그 이후 노무현대통령이 제주에 방문하여 공식사과를 했습니다. 이것으로 4.3사건은 근대사 중에서 과거사 정리가 가장 깔끔하게 잘되어진 사건으로 꼽힙니다.
제주도민이 아닌 이상 제주 4.3사건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제주4.3평화공원의 방문이 우리 모두가 제주 4.3사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4.3백비

기념관의 첫 번째 전시물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비’입니다. 4.3사건이 가장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진 사건이라고 꼽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발굴되어지지 않은 수많은 유해들과 정립되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그 날, 이 백비는 비문이 새겨져 세워질 것 이라고 합니다. ‘백비’가 세워지는 그 날까지, 제주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합니다.

4.3백비 :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4.3백비 :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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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제주 4.3 바로 알기", 제주4.3평화재단
* "제주 4.3 평화공원" 팜플렛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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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세인
  • 소속 : 신문방송학과
  • 이메일 : q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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