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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건축
거리와 건축
20세기 프랑스 예술의 영광을 위해서
그랑팔레에펠탑으로 철제 건축기술의 끝을 보여준 프랑스는 20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건축기술을 선보였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기념함과 동시에 경쟁국인 영국을 앞지르기 위해 프랑스는 아르누보 기법으로 그랑팔레를 건축한다. 4년에 걸쳐 제작된 이 건축물이 세상에 등장하자 세계인들은 “프랑스의 예술의 영광을 위해 헌정된 건축물”이라는 호평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20세기 프랑스 건축을 대표하는 그랑팔레를 통해 프랑스의 예술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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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최초의 공식적인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가 개최되었다. 철제골조와 유리로만 만들어진 투명한 박람회장은 그야말로 세계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벽돌과 같은 기존의 건축 소재를 쓰지 않고 거대한 온실을 만든 영국은 세계에 자신들의 기술력을 뽐내었다. 이후 영국의 수정궁(The Crystal Palace)을 뛰어넘기 위해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철제탑인 에펠탑을 선보였다. 그렇게 기술의 발달이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었다. 그 후 세계 각국은 자신들의 기술을 선전하기 위해, 또 그 기술을 보기 위해 만국박람회로 모여들었다.
세계박람회라고도 불리는 이 박람회는 세계 각국의 나라가 참가하여 자국의 생산품을 전시하는 장이었다. 근대시기 세계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공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특히 유럽은 각 나라의 산업 발전 정도에 따라 서로 영향을 받았고, 그 차이가 나라별로 나타났다. 세계 여러 국가들은 자신들의 기술적 발전을 비교하는 자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1756년 영국산업박람회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박람회들이 개최되었다.
사실 만국박람회는 19세기 각 나라의 기술 경쟁 구도가 드러난 장이었다. 각 나라별로 새로운 건축기술과 공산품을 전시하여 국가 간의 산업과 과학기술을 경쟁하였다. 또한 단순 전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판매도 이루어졌기에 그 경쟁은 더욱 심해졌고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기술경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극심하였다. 이후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프랑스가 에펠탑을 선보이면서 프랑스의 우위가 점쳐지는 듯 보였다.
20세기 첫 만국박람회
에펠탑으로 철제 건축의 끝을 보여준 프랑스 정부는 1892년, 20세기라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축하와 환영의 의미를 담은 박람회의 개최를 발표했다. 이후 8년 뒤인 1900년 4월 14일, 파리에서 20세기를 맞이하는 첫 국제 행사인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지난 19세기의 과학·건축·산업 등의 성과를 기념함과 동시에 20세기의 발전을 내다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박람회에서는 많은 발명품들과 건축물들이 전시되었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건축 양식인 ‘아르누보(Art Nouveau)’가 널리 선보였다. 아르누보 양식은 유럽 전역을 강타했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 건축양식으로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약 4년간에 걸쳐서 건축된 건물이 바로 ‘그랑팔레(Grand Palais)’이다. 그랑팔레는 ‘프랑스의 예술의 영광을 위해 헌정된 건축물’이라고 할 만큼, 지어질 당시 혁신적인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축되어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엄청난 이목을 끌었다. 샹젤리제 거리 중간쯤에 위치한 그랑팔레는 말 그대로 웅장한 궁전이라는 의미답게 크고 화려한 형태로 지어졌다. 지붕에는 마차석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지붕은 높이 43m의 유리 돔으로 건축되었다. 이 유리 돔에는 청동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 청동조각이 밤이면 조명을 받아 신비함을 자아내기로 유명하다. 강철과 석재 그리고 유리를 결합해 만든 이 특별한 건축물은 20세기를 맞이한 프랑스 건축 기술의 집대성을 상징했고, 그것은 만국박람회를 찾은 관람객들에게 프랑스 기술의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예술의 전환
그랑팔레의 시작은 만국박람회를 통해 프랑스의 기술 발전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에 만국박람회가 끝난 이후에는 새로운 용도를 찾아야했다. 만국박람회가 종료된 이후 국가 소유물로 지정된 그랑팔레는 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개전되면서 새로운 용도를 찾았다. 제국주의의 팽배로 인해 시작된 전쟁에 프랑스도 참전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군의 군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전시실은 미술품 전시 대신 부상자들의 병실로 쓰였고, 회복된 군사들은 본당에서 훈련한 뒤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그랑팔레는 예술적 용도로 이용되면서 또 다른 형태로 프랑스를 대표하게 된다. 21세기로 접어든 2000년도에 역사적인 건물로 인정받은 그랑팔레는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현재는 프랑스 국립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설전시를 주로 하고 있는 프티팔레와 다르게 프랑스 국립박물관협회에서 엄선한 전시회만을 개최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발견의 궁’으로 불리는 과학기술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그랑팔레 청동장식
유리돔과 석상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는 그야말로 경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경쟁 속에서 프랑스는 영국과 끊임없는 대결구도를 그렸다. 이 대결은 철제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건축물을 프랑스가 선보이면서 승기를 가져왔다. 우위를 점한 프랑스는 20세기를 맞이하여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프랑스 예술을 건축으로 표현하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건축 기술의 극점을 나타내었다. 그랑팔레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프티팔레와 함께 근대시기 프랑스의 기술력을 대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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