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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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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의상과 화엄사상이 숨쉬는 곳
영주 부석사한국 불교의 대가 의상과 화엄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명찰, 그리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의 산사 중 하나로 가람배치를 아주 잘 보여주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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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에는 한국 불교의 대가 ‘의상’과 ‘화엄종’을 잘 알아 볼 수 있는 절인 ‘부석사’가 위치하고 있다.
부석사(浮石寺)의 창건설에 대해서는 모두 한 번 쯤 들어보았을 법하다. 언제가도 아름답다는 명찰로 유명하지만, 가을은 사랑의 계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부석사가 지어진 배경과 설화에 대해 알아보자.
▲부석사는 국보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부석사 창건설
부석사를 창건한 사람은 ‘의상’ 이다. 그는 본래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진골 출신이었기 때문에 앞날이 보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상은 불도를 택하여 출가한다. 이후 당나라에 건너가게 되어 양주의 한 집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이 때 그 집의 ‘선묘’라는 여인이 의상을 보고 사모하게 된다. 화엄연기라는 일본 고산사에 위치한 초상에 의하면 의상이 단정한 모습이며, 미남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그는 마음이 바위같아 오로지 불(佛)을 공부할 뿐이었다. 그러한 모습에 선묘는 불교에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도심이 생겨나 의상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한다.
그 후 의상은 중국 화엄의 2조(2祖)인 지엄의 아래에서 화엄의 공부에 몰두하던 중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신라 귀국의 배에 오르게 된다. 의상의 귀국 소식을 들은 선묘는 바다로 투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몸이 대룡(大龍)으로 변해 무사히 신라땅에 배가 닿게 하게 해주고, 스님의 법이 전할 수 있게 해주소서.” 라고 말이다. 이렇게 외치니 정말 배가 신라로 순식간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의상은 덕분에 무사히 신라에 이를 수 있었고, 그의 말을 들은 조정은 의상에게 사찰을 지으라는 명을 내린다. 이렇게 돼서 지은 절이 부석사이다. 의상은 부석사를 짓기 위해 현재 부석사가 위치하고 있는 영주 봉황산에 갔는데,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 때문에 그러할 수 없었다. 이 때 선묘룡(龍)이 나타나 근처 사방 십리의 큰 돌들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놓자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은 굴복하였고, 마침내 672년 그 위치에 부석사를 지을 수 있었다. 부석(浮石)의 ‘돌을 들어 올리다.’ 라는 의미는 선묘룡이 돌을 들어올렸다가 놓았다는 데서 이름 붙었다.
부석사의 가람배치
부석사는 산사의 가람배치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산에 있는 절을 한 눈에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배치와 공간을 나누어 절을 이해해 나간다면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데 보다 수월할 것이다. 절의 배치를 일컬어 ‘가람배치’라고 한다. 부석사는 크게 ‘일주문’, ‘천왕문’, ‘안양루’, ‘무량수전’, ‘조사당’, ‘자인당’ 공간의 총 6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답사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이 6개의 공간에 ‘범종루’ 공간을 추가하여 총 7가지 공간으로 부석사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1)일주문(부석사의 시작)
처음 부석사 매표소를 지나면 ‘太白山 浮石寺(태백산 부석사)’ 라는 현판과 함께 일주문 공간이 시작된다. 태백산의 한 봉우리가 바로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이기 때문에 그러한 현판이 붙은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양 옆에 사과나무 밭을 마주하게 된다. 사과나무 밭을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두 번 째 공간인 천왕문 공간이 시작된다.
2)천왕문(부석사의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
천왕문을 지나면 양 옆에는 사과나무가 아닌 사천왕이 위치하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대석단이 펼쳐져 있어 무엇인가 웅장하면서도 압도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왼쪽으로는 3층석탑이 한 쌍을 이루어 있는데, 이 2개의 탑은 본래 부석사에서 만든 탑은 아니고, 1958년, 주변에 있는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탑 뒤쪽으로 존재하는 불상들도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오른편에 위치하는 유물 전시각 또한 2000년대가 다 돼서야 새로이 두채가 만들어졌다. 부석사는 잘 보존이 됐으면서도 계속해서 공사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절이 원래 모습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석사는 창건된지 1400년이 다되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있었던 유명한 절이다. 처음과 같은 모습을 띠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름에 있어서 처음과 같은 모습을 띨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람도 세월이 지나가면서 외모는 계속해서 바뀌지만 그 사람 자체의 향과 특색은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부석사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바뀌어 나갈 것이다.
3) 범종루에서 불교를 만나다
천왕문 공간을 지나, 안양루 공간에 가기 전 우리는 범종루에 서게 된다. 범종루에 서게 되면 앞에 돌기둥 두 쌍이 굳건히 서있다. 이 돌기둥들의 이름은 ‘괘불1)지주(掛佛’支柱)로, ‘괘불(掛佛)’을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의미이다. 왜 괘불을 바깥에 걸어두었고 이 보조돌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부석사는 많은 신도들을 가진 절이었다. 그래서 대규모 불교행사등이 있을 때에는 전각안에 모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각안의 불화나 불상 대신 바깥에서 괘불을 걸어두고 의례를 지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전각이 아닌 바깥에서 진행해야하는 행사가 있으면 괘불을 걸어두고 행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이 부석사 괘불은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기도 하며, 오불회괘불탱같은 경우 보물 제 1562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괘불지주를 보며 옛날 부석사에서 불교행사를 행하던 불교 신도들을 상상하고, 느껴본다면 절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4)안양루(극락을 이루는 공간)
불교의 최종 목표는 극락세계에 가는 것이다. ‘안양(安養)’은 이 ‘극락’과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안가 하나의 석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석등을 보기 전 까지가 안양루 공간이다. 부석사의 하나하나의 공간에는 불교의 종교적 의미가 새겨져 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5)무량수전(부석사의 꽃, 극락 그 자체)
계단을 조금 오르면 그 유명한 무량수전을 맞이하게 된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중 하나이며, 보존과 관리가 뛰어나다. 사학과가 아니더라도, 중고교시절 주심포기둥, 목조건물등 한국사 시험공부를 하면 무량수전은 익숙한 이름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왜 이름이 무량수전인지는 대부분 모를 것이다. 무량수전은 국보 18호로 지정되있으며, 국보 45호인 ‘아미타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의 본전(本殿)이다. 불교에서 아미타여래는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인물이며, 무한한 생명과 지혜를 가진 인물이기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량수불을 모시는 곳(전각)이기 때문에 무량수전이라고 이름 붙은 것이다. 무량수전의 현판인 '無量壽殿'은 고려 공민왕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역사적, 종교적으로 참 깊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부석사의 모습
▲배흘림기둥이 있는 무량수전이다.
5-1)무량수전 석등(국보 17호, 무량수전의 시작)
무량수전을 들어가기전, 마당에는 2.97m의 큰 석등이 서있다. 우리는 그 크기에 놀라 앞에서서 보게되면 아름다운 조형미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될 것이다. 가장 아래에서 받쳐주는 대석 바로위에는 불교를 상징하는 꽃인 연꽃이 여덟잎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기둥바로 위에는 다시 연꽃이 여덟잎으로 조각되어 있다. 균형미를느낄 수 있었던 것도 잠시 바로 위에는 사방으로 창이 나있는데, 그 창 사이사이에는 공양보살상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그 모습에 사로잡힌다.
5-2)아미타여래좌상(국보 45호, 무량수불)
석등을 지나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무량수전이라는 이름을 갖게해준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2.78m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데 고려시대 최대(最大)의 소조상이다.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가, 이 곳 무량수전은 극락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아미타여래좌상의 배치또한 이곳이 극락의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보통 전각을 들어가게 되면, 전각 정 가운데에서 문쪽으로 바라보고 있는(남향) 불상을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무량수전의 소조불상은 서쪽가운데에서 동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동향) 이는 극락세계를 주관한다는 아미타불은 다른 불상과 달리 남향하는 것이 아니라, 극락(서방정토)을 뜻하는 서쪽 방향에서 동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는 불교적 교리를 보여주는 배치인 것이다
5-3)선묘각(선묘를 느낄 수 있는 장소)
무량수전을 나와 동쪽방향으로 가게 되면, 조그마한 집 한 채를 볼 수있다. 그 집은 바로 의상을 사모하였던 선묘를 기리는 마음에 만든 것이다. 그녀의 초상화가 선묘각 안에 걸려 있다고 하니, 궁금한 사람들은 선묘각을 꼭 들려 확인해보면서 선묘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좋을 것 같다. 정말로 선묘가 용이 되어 의상을 도와주었으며, 돌을 들어올려 부석사 터에 있던 소승들을 쫒아내었는지는 알 수없으며 믿기 힘든 소리이다. 하지만 ‘단군신화2)’를 해석하는 것처럼 부석사 창건설도 해석해보자. 의상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 부석사, 무량수전을 지은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부석사를 짓기 위해 영주로 왔을 당시에 영주에 있던 기득세력, 토착세력이 절을 짓는 것에 대해 반발과 그들과 ‘의상’과의 사이를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본래 영주 사람이 아니기에 토착세력들은 의상을 탐탁치 않게 보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의상이 조정의 힘이나 당나라의 힘을 빌려 그들을 제압하고 봉황산에 부석사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5-4)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 249호, 부석사의 특이함)
무량수전 안의 불상의 배치가 특이한 점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부석사의 특이한 배치는 이 부석사 삼층석탑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보통 불탑은 전각, 법당의 앞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 석탑은 무량수전의 앞이 아닌 무량수전 동쪽 언덕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무량수전의 불상이 서쪽에서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시선에 맞추어서 동쪽 언덕에 이 석탑을 지었다고 한다. 또 더불어서 이미 석등이 무량수전 마당에 먼저 지어졌기 때문에 자리가 비좁고 미적감각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석탑은 이후에 조사당, 자인당 공간으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심심함을 덜어주어 시각적으로 매료시킬뿐만 아니라 무량수전을 보러 온 사람들로 하여금 뒤편에 위치한 자인당, 조사당공간으로 가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6)조사당(국보 19호, 의상을 만나다.)
부석사 삼층석탑을 지나면 두가지 길로 나뉘게 되는데, 왼쪽으로가면 자인당공간, 오른쪽으로 가면 조사당 공간이다. 조사당 공간부터 알아보자. 조사당은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를 기리는 곳이다. 앞서 만난 석등, 무량수전, 삼층석탑과는 달리 조사당은 초라하지만 단정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거창하게 짓지 않은 까닭은 의상이 검소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를 잘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신라 문무왕은 노비나 재물을 의상에게 보내었지만 의상은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웅장하다. 벽면에는 천왕문에서 보았던 사천왕들이 그려져있으며 보살상 또한 그려져 있다. 의상의 겉은 검소하게 지냈지만 속은 누구보다 깨우치고, 부유했던 모습과 일치한다. 또한 천왕과 보살상이 중앙이 아닌 벽면에 그려져있는 것은 신도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기렸는지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입구가 아닌 가장 뒤쪽에 조사당이 있을까? 의상은 화엄사상을 어디서 공부하고 펼쳐야 할지 고민하던 중 부석사 위치를 선택하여 수도하였다. 이 곳에서 처음 의상이 화엄을 수도하였던 곳이 현재 조사당의 위치였다고 한다.
7)자인당(보물 제 220호)
마지막 공간인 자인당에서는 불상 세 분을 만날 수 있다. 아미타불로 여겨지는 불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화엄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 상이 각각 존재하는데, 비로자나불상 둘은 보물 제 220호에 지정되어 있다. 불상들은 9세기인 신라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데, 오랜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많이 닳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작은 불상들에서는 여전히 당당하고 장엄한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아미타불은 광배가 없지만 양 쪽의 비로자나불은 광배와 대좌가 완전한 모습이 특징이다.
화엄종
의상과 부석사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지식이 쌓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상이 출가하여 한평생 공부하였던 ‘화엄’은 어떤 종교이며 어떤사상일까?
화엄종’은 ‘화엄경’을 경전으로 삼는 중국 불교의 한 종파이다. 당나라시기에 생겼는데, ‘천태종’과 함께 중국 불교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릴만큼 발전하였다. 화엄종의 배경은 중국 동진(東晉)말시기부터 틀을잡기 시작한다. 동인도출신 승려였던 ‘불타발타라’가 ‘화엄경’을 한역한 이후 중국에서 화엄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후, 이 화엄경을 읽고, 사경하는 화엄신앙이 나왔으며 화엄경에 근거하는 신앙단체인 ‘화엄재회’가 만들어지면서부터 더욱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러한 기본적인 배경아래에서, 두순(杜順)은 화엄종 제 1조(祖)가 된다. 그는 화엄에 대하여, 학문적인 연구가아닌 실천적이며 신앙적인 것을 중요시하였다. 화엄철학이 널리 대성된 것은 3조 ‘현수(賢首)’부터인데 그래서 화엄종의 다른 이름을 현수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종’이 발전하면서 화엄은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송(宋)’나라가 계속해서 화엄의 맥을 이어나갔고, 이외에도 많은 불승들이 화엄사상을 공부해나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의상과 원효가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의상은 중국 화엄종 2조인 ‘지엄’ 아래에서 제자로 지내기도 하였으며, 부석사를 창건하여 많은 신도들에게 화엄을 전파하였다. 또한 해동화엄종을 개창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고, ‘화엄경’을 요약한 화엄일승법계도는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 또한 화엄학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화엄경소는 화엄종의 3조인 현수의 저서 탐현기에 인용될 정도였다.
화엄사상
화엄종에서는 어떤 사상을 공부하는 것일까?
화엄사상은 기본적으로 전 우주를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則一)의 입장에서 본다. 하나의 물질이나 물건이 즉 전체인 우주이며, 하나의 세계와 우주가 곧 물질이나 물건이다. 라는 뜻으로, 세계의 모든 것은 어떤 것이든 홀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서로 나누어지거나 다른 것은 없으며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이는 다시 시공간을 떠나 모두가 서로의 원인이며, 차별이나 대립을 나누지 아니하고 언제나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를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일컫는다. 특이한 점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화엄사상에서는 하나로 보는데, 이를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평등 속에서 살아가거나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법은 아니다. 화엄에서는 4가지 세계로 나누는데 이법계, 사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로
사법계는 모든 것이 차별하고 대립하는 세계를 말하며 두 번째로 항시 평등하고 차별, 대립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사법계와 이법계가 선과 악의 세계처럼 극단적으로 나누어진다면 세 번째인 이사무애법계는 일어나는 상황과 물질은 결코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평등하면서도 차별이 있고, 차별적이면서도 평등이 나타나는 세계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사무애법계는 이사무애법계에서 조금 더 나아가 모든 현상이 서로 인과관계를 맺는 세계를 말한다. 이 사사무애법계가 바로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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