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양도시문화탐방
거리와 건축
거리와 건축
근대를 머금은 장소, 아키타 상회
시모노세키 관광정보센터(구 아키타 상회)아키타 상회는 현재 회사로서 운영되지는 않고 건물만을 빌려 시모노세키 관광정보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의 1층에는 시모노세키의 각종 기록물과 아키타 상회 자체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2층과 3층은 일본식이다. 과거 2층과 3층은 연회를 열 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소품처럼 놓여 있는 탁자나 시계 등은 전 세계의 지점을 통해 아키타 상회가 수입한 것이다. 건물 내에는 음식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수동식 승강기, 수세식 화장실, 모리 번주의 문양을 새긴 가구들, 1층의 서양식 구조 등이 있어 과거 아키타 상회의 위상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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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로
현해탄 밤바다
우리는 가끔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들에 있어서 답이 보이지 않아 답을 찾고 싶을 때는 과거로 돌아가보곤 한다. 과거로 돌아가 보면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내가 찾던 딱 원하던 해답을 찾기도 한다. 이번 「해양문화탐사」도 우리와 함께 있는 바다를 어떻게 하면 다양하고 풍부하게 볼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떠난 탐사였다.
바다를 좀 더 풍성하게 보기 위해서는 바다와 관련된 과거의 해양문화를 돌이켜 보며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명확히 증거가 남아있고 시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해양문화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시모노세키에 있는 ‘아키타 상회’이다. 이 ‘아키타 상회’의 근대 건축물과 관련된 역사와 해양문화를 문헌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두 눈으로 직접 보며 느껴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키타 상회’에 가기 위해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에 직항하는 ‘성희호’를 탔다. 이 성희호는 우리가 탔던 배의 이름이고 이 배는 대명사로 예전부터 부관연락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부는 부산의 ‘釜’이고 관은 하관(시모노세키)의 ‘關’을 따서 부산과 하관을 연결 시켜준다고 해서 부관연락선이라고 불렸다.
이 부관연락선은 1905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개통이 됐다. 부관연락선의 개통은 이후 일본이 조선수탈을 수월하게 해줄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고 이후 부관연락선을 통해 일본의 신문물이 들어오기도 했으며, 조선인의 징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배는 시모노세키에 가기 위해서는 현해탄을 건너야 한다. 우리가 시모노세키에 가는 도중에 첫 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이 현해탄을 건넜다는 것이다. 이 현해탄은 임화의 시 『현해탄』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거친 바다를 뚫고 과거의 젊은 지식인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에 공부하기 위해서 건너갔던 곳이다. 또 화가 ‘이중섭’도 현해탄을 두고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했다. 이중섭은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1)
이처럼 우리에게 아픔이 있는 바다를 건너면서, 밤바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과거를 생각하면서 무거워진 마음과 새로운 낯선 곳에 간다는 설렘 반을 가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을 했다. 시모노세키는 일본 야마구치현에 위치했으며, 오래 전부터 항구도시로서 역할을 수행하여 경제적으로도 야마구치현을 대표하는 도시이다. 처음 와 본 시모노세키는 부산 못지않게 바다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오히려 부산보다도 항구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느낌도 강했다. 부산도 항구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지만 시모노세키 인구 13배에 달하기 때문에 다양한 색깔이 있는 반면 시모노세키는 항구에 집중한 느낌이었다.
2) 두 번의 고비를 넘어 보게 된 아키타 상회
아키타 상회 전경
아키타 상회는 현재 회사로서 운영되지는 않고 건물만을 빌려 시모노세키 관광정보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의 1층은 시모노세키의 각종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아키타 상회 자체에 관한 자료 또한 공간을 마련하여 안내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1층의 방 하나를 들여 시모노세키를 대표하는 시인인 카네코 미스즈의 작품과 마지막 사진을 전시해놓기도 했다.
아키타 상회의 내부사진 1
아키타 상회의 내부사진 2바깥에서 바라 본 옆문
1층을 둘러보다보면 막혀 있는 거대한 문과 X자 모양의 나무발판 같은 것이 눈에 보이는데, 현재에는 매립되어 생겨난 도로 옆에 위치해 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바다와 붙어 있어 배에서 물건을 내려 지하 창고로 이어지게끔 건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목조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자 1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층이 서양식이었다면 2층과 3층은 일본식 그 자체였다. 슬리퍼를 벗고 안쪽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가장 놀라웠던 점은 기둥과 바닥 문틀을 언제든지 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키타 상회의 내부사진 2
아키타 상회의 내부사진 3
당시 2층과 3층은 주거용뿐 아니라 연회를 열 때도 사용했다고 하는데, 연회를 할 때가 되면 기둥과 바닥틀을 제거하여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층 전체에 깔려 있는 다다미는 하나에 2만엔(약 20만원)이 넘어가는 최고급품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소품처럼 놓여 있는 탁자나 시계 등은 아키타 상회가 당시 조선반도를 넘어 대륙까지 지점이 있었는데 그 지점들에서 사용하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아키타 상회 건물은 건물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옥상에 정원과 저택, 등대역할을 하던 옥탑이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들어가 볼 수 없다고 한다. 본래는 옥상 또한 올라갈 수 있었지만 2년 전 태풍의 영향으로 일부가 무너져 현재는 전혀 개방하고 있지 않으며 자체적인 관리는 하고 있으나 일반 관람객에게 언제 개방을 할지에 대한 계획은 없다고 한다.
우리는 건물을 둘러보면서 단편적인 설명을 들은 것뿐이었지만 요소 하나하나가 그 당시의 위세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마냥 옛날 건물인 줄 알았는데 음식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수동식 승강기라든지, 100년도 전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지금에서도 종종 보이는 수세식 화장실, 가문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모리 번주의 문양을 가구에 세기고, 1층의 건축을 위해 서양의 목수를 직접 불러 설계하게 하는 등 그야말로 당대에서는 최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던 것 같다.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건물용 목재와 식료품, 생활용품 등을 취급하여 겉으로 크게 드러나 있진 않지만 조선반도 및 만주와 대만까지 이어지던 지점들, 그 지점들을 포함하여 패전 이후 급격하게 쇠퇴하였다는 점, 창립자인 아키타 토라노스케가 정치계·경제계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점 등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냥 감탄할 수도 없는, 복잡 미묘한 심정을 뒤로한 채 상회를 빠져나왔다.
3) 그리고 부산, 나의 부산
부산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특별한 도시다. 동북아의 해양수도, 관광지로서의 부산, 다이나믹 부산. 수많은 수식어들을 들어왔지만 썩 체감은 되지 않는다. 20여 년을 부산에서 살아오면서 받았던 인상은 부흥하는 도시라기보다 정체된 도시의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부산을 소개해달라고 물어온다면 자신 있게 꼽을 수 있는 장소가 그리 많지 않다. 해운대 바닷가, 자갈치시장, 서면 및 센텀시티 부근. 나름의 역사가 묻어 있고 부산을 담아내고는 있으나 부족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부산은 근대기에 있어 그 어느 도시보다 주목할 만한 도시고 역사적으로도 크나큰 가치를 머금은 도시다. 항구도시로써 개항기에 새로운 문물이 드나들었던 장소이며 한국전쟁 무렵에는 임시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간들은 입에서 입으로, 글이나 자료로써 전해지기도 하지만 건축물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실히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부산의 근대 건축물은 대부분이 소실되고 현재에 있어서도 보존이 썩 원활하지 않은 실정이다. 초량일식가옥의 경우 주변 대규모 재개발공사로 문틀이 휘어지고 벽에 금이 갔으며, 보수동에 위치한 부산지방임시측후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기상청이었는데 이미 해체되어 복원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시모노세키를 둘러보면서 머릿속 한편에 항상 ‘부산은.. 부산은..’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분명 우리 부산 또한 재개발을 하더라도 기존의 문화유산을 잘 다듬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을 텐데. 입 안이 씁쓸했다. 부산이 자랑하는 자연과 경관을, 그리고 역사를 드러낸다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동북아 해양핵심도시로 자리매김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부산이 좀 더 밝게 빛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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