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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흔적, 나가야 쵸후마을

나가야 쵸후마을
  • 탐방일시 :2018.06.26
  • 조회수 :1213
  • 좋아요 :0
  • 위치
    Chofu, Shimonoseki 750-0001, Yamaguchi Prefecture
  • 키워드
    무사저택, 쵸후마을, 시모노세키, 에도시대, 일본역사, 산책, 쵸후모리저택

쵸후마을에는 과거 일반 백성부터 영주, 신분이 높은 사람들까지 모여 살았다. 마을의 입구와 가깝거나, 저지대에는 비교적 단순하고 검소한 주택들이 즐비하고 있고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사치스럽고 화려한 주택들이 있다. 저지대에는 일반 백성들이 주로 모여 살았고 영주나 고위 관직들은 고지대에 살았기 때문이다. 쵸후마을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반발 무대가 된 곳으로 무사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1300년대의 에도시대 일본을 느낄 수 있다.

나가야 쵸후마을 대표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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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흔적을 찾아서

사무라이의 마을에 왔으니 ‘사무라이(侍)’와 ‘무사(武士)’의 차이점을 정의하며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먼저 사무라이는 높은 관직을 노릴 수 없고, 학업이 비교적 부족한 직책을 말한다. 그러나 무사는 사무라이와는 달리 이름에 ‘士’ 가 들어있듯이 높은 관직을 노릴 수 있고, 여러 학문을 깨우친 직책을 말한다. 필자 또한 이 무사저택을 돌아보며 알게 된 내용으로 전에는 사무라이와 무사를 똑같지만 무사를 부르는 일본만의 호칭이 사무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엄연히 구분되는 거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라이와 무사에 대해 정의도 내려봤으니 본격적으로 나가야를 살펴보자. 나가야란 야마구치 현 쵸후마을에 있는 에도시대(1603~1868)의 사무라이 연립저택이다. 필자는 쵸후마을의 입구를 알려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저택을 지나면 본격적인 쵸후마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건물은 외관으로도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구조도 없고 단순히 길게 늘어서있는 모습이다. 건축의 규모와 격자 형태의 창문에서 에도 후기의 건축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나가야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5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보존을 위해 현재의 자리로 이축된 것이고 이축 된 뒤, 이 건물은 시모노세키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저택의 내부는 늘어서있는 외부의 모습 그대로 길게 이어져있었지만 각각의 방으로 나눠진 형태가 아닌 벽이 없는 길고 좁은 복도와 비슷한 공간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이전하기 전의 모습도 지금 상태 그대로였다면 이곳에서 사무라이들이 생활했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과연 몇 명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구조였다. 단순하게 휴식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자신의 본가는 따로 있었던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좁은 곳에 여러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가야에 대해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아 역사적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나가야 입구. 흙길을 따라 가면 사무라이 저택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있다.

나가야 입구. 흙길을 따라 가면 사무라이 저택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모노세키의 역사를 이어온 마을, ‘쵸후’

‘한국의 전통을 유지한 마을’이라 하면 어떠한 것이 떠오르는가. 대체적으로 안동의 하회마을, 전주의 한옥마을이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마을들은 한 집안이 모여 사는 마을인가 하면, 전주의 경우 1930년 전주부성이 허물어지자 서문 밖 천민 거주지에서 모여 살던 일본인이 성 안으로 들어와 상권을 차지하면서 세력이 커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한옥을 지어 살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에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일본의 과거를 유지한 마을은 어떤 마을이 존재할까.

일본은 비교적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마을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쵸후마을’이다. ‘쵸후마을’이란 간단하게 앞서 나가야를 통해 살펴본 ‘사무라이 역사의 본거지’, ‘사무라이의 마을’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마을에는 일반 백성부터 영주, 신분이 높은 사람들까지 모여 살았는데, 마을 입구부터 천천히 걸어올라가다 보니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을의 입구와 가깝거나, 저지대 주택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검소한 주택들이 즐비하고 있지만, 마을에서 멀고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표현하자면 사치스럽고 화려한 주택들이 있었다. 이는 바로 저지대에는 일반 백성들이 주로 모여 살았고 영주나 고위 관직들은 고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마을을 거닐다보면 이러한 변화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쵸후마을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반발 무대가 된 곳으로 오래된 신사와 사원이 많은데 이곳은 다른 백성들도 존재했지만 무사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라는 점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낯설게 다가왔다. 1320년에 지어지고 불전이 국보인 코잔지와 쵸후정원 등 길의 여러 골목 사이를 거닐다보면 1300년대의 에도시대 일본을 느낄 수 있다.

번주의 저택 속으로

쵸후마을 안에 위치한 모리저택은 시모노세키를 지배하고 있던 무사 모리 가문의 제14대 영주 모토토시(毛利元敏)가 지금으로부터 100년을 넘긴 메이지 36년(1903)에 지은 저택으로 지난 1993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작아 보이는 저택의 입구와 달리 내부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집 구조와 회유식의 중앙 연못을 중심으로 돌, 석등, 단풍 등의 절묘한 배치로 무가주택구조의 중후한 안채와 흰색 벽에 둘러싸여진 일본 정원이 펼쳐져있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한 정원 외에도 모래 가루와 나무들로만 꾸민 정원도 있었는데 연못이 있는 정원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연못이 있는 정원은 화려함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모래정원은 절제를 지킨 정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아름다운 정원의 주위로 저택 곳곳을 거닐다보면 그곳만큼은 마치 다른 세계,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평온했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쵸후 모리저택의 입구. 입구만 보면 번주의 집이라기엔 작아보인다.

쵸후 모리저택의 입구. 입구만 보면 번주의 집이라기엔 작아보인다.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동상.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다이묘이며, 나가토 쵸후번(현재의 시모노세키 쵸후 지역 일대)의 초대 번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동상.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다이묘이며, 나가토 쵸후번(현재의 시모노세키 쵸후 지역 일대)의 초대 번주

집의 구조는 굉장히 복잡했다. 미닫이문들이 하나의 방을 건너자 다시 문이 있고, 복도를 거닐면 또 문이 보였다. 일본의 성이나 고위 관직자 저택의 구조는 방어형으로 만들어졌다고 익히 들었는데 과연 이 정도라면 함부로 침입을 하거나 설령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미로같은 방에 갇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모리저택은 당시 메이지 천황이 하루 머물고 갈 정도라고 하니 이 저택이 그만큼 고급스럽고 운치를 느낄 수 있는 저택이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저택 내부를 둘러보았을 때 저택 내 방의 일부는 당시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었고, 100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저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저택의 구조와 정원은 오늘날 우리들이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지금 봐도 멋진 이 공간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화려하게 보였을까.

모리저택의 마루에 앉아 본 정원의 모습이다. 나무와 잔디, 돌의 조화가 아름답다.

모리저택의 마루에 앉아 본 정원의 모습이다. 나무와 잔디, 돌의 조화가 아름답다.

모리 저택의 내부이다. 정갈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어우러진다.

모리 저택의 내부이다. 정갈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어우러진다.

모리가문의 우여곡절

이렇게 아름다운 저택의 주인들은 바로 모리가문(毛利氏)이다. 이 모리가문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모리 가문을 이끌었던 사람들 중에 모리 가문의 부흥과 쇠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두 명의 인물을 선정해서 보려고 한다.

먼저, 모리가문을 산인˙산요 지역 10개국을 지배하는 다이묘로 성장시킨 인물인 모리 모토나리를 보고자 한다. 모리 모토나리는 아키를 본거지로 한 영주 모리 호로모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먼저 그는 모리 가문 가신들의 독립성을 빼앗고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해서 모리 가문의 군사권, 행정권, 재판권에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뿐 아니라 행정 집행에 필요한 군법서와 부교 집단을 조직하는 등 체제 정비를 마련하며 발돋움을 준비해놓았다.
그는 처음에 오우치 가문의 하루카타에게 협력하며 히로시마 만의 수군 육성에 노력했으나, 1554년 이와미의 요시미 마사요리의 하루카타를 적으로 두고 같이 협력하자는 요청에 의견을 수용하고 하루카타와 맞서게 되었다. 모리 모토나리는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오우치 가문 내에서 이간책을 사용해서 가문의 힘이 분산되도록 한 후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모리군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기습공격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하루카타는 자결하게 되고, 곧이어 하루카타가 옹립한 오우치 가문의 요시나가를 죽임으로써 오우치 가문을 몰락시켰다.
모리 모토나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마고 가문의 토벌을 개시했다. 먼저 그는 아마고 가문이 지배하고 있던 이와미의 은광을 빼앗고 이와미 전역을 지배한다. 그리고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명을 받들어 오토모 가문과 강화를 해서 아마고 가문을 공격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모토나리가 아마고 가문의 토다성을 함락시키면서 아마고 가문은 몰락하게 된다. 이렇게 모리 모토나리는 아키의 지방 호족에 지나지 않았던 모리가문을 주고쿠 지방의 다이묘 세력으로 성장시키게 되었다.

이 모리 가문의 영광을 이어나간 사람이 바로 모리 데루모토이다. 모리 데루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활동했던 다이묘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대항하다가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난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과 협력해서 임진왜란에도 참전하게 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의 1592년에서 1604년 사이에 12번 정도 모리가문에 관한 기사가 12번 정도 등장하게 되는데 그중에 10번의 지분을 모리 데루모토가 가지고 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신임을 얻고 도요토미 정권을 지지하는 오대로 중 한 사람이 되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 기세는 변하게 된다.
도쿠카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기 전, 천하의 패권을 놓고 도쿠카와 이에야스, 이시다 미쓰나리, 미노의 세키가하라가 서로 경쟁을 벌인 전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모리 테루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맞서서 서군의 총대장으로 출진했다가 패배하고 만다. 그 결과 많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거점이었던 히로시마에서도 추방당하게 된다.
1603년 도쿠가와 정권으로 교체된 후, 다이묘들은 쇼군과 친함의 정도에 따라 신판, 후다이, 도자마로 분류되었는데 신판, 후다이는 도쿠가와 밀접한 관계였고 도자마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복종한 다이묘여서 겉으로는 도쿠가와 막부와 가까운 관계로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도쿠가와 막부에 미움을 샀다. 그래서 도자마 다이묘들은 시코쿠나 큐슈 등 변경에 위치하게 되었다. 모리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리가문은 도자마 다이묘가 되어 변방에 밀려나게 되고 테루모토는 변방인 하기로 거점을 옮기며 히로시마성을 다른 다이묘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250년 후에, 변방의 이 항구도시에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고 막부를 무너뜨리는 주역들이 연이어 속출되면서 하기는 조카마치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현재의 모리저택

다른 사람이 살던 공간을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있는가? 일본은 모리 가문의 위엄을 뽐내는 모리 저택은 일본의 중요한 문화재로 남겨두어 관광산업의 일종으로 활용하고 있다. 모리 저택의 시설물을 보수공사를 거쳐서 그대로 원형의 형태로 보존한 후 감상 뿐만 아니라 여러 체험을 제공한다. 입장 시, 입장료는 존재하며 별도의 추가 요금을 지불한다면 모리 저택 내에서 말차와 다과를 마시면서 감상하며 모리 저택만의 다도를 즐길 수 있다. 굳이 추가 요금을 내지 않아도 별도로 녹차를 뽑아 마실 수 있는 기계가 있어서 한 손에 녹차를 들고 여유롭게 저택 내부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또한, 메이지 천황이 머물렀다 간 장소도 그대로 보존하는데 그곳에는 사계절마다 전시를 조금씩 달리해놓는다고 한다.
메이지 천황이 머물렀다 간 장소이다. 여름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메이지 천황이 머물렀다 간 장소이다. 여름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다도뿐 아니라 저택 내에 비치된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물론 전통 그대로 기모노를 완벽하게 입어보기엔 힘들고 가볍게 입고 저택의 분위기를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이 체험에는 별도의 추가 요금이 들지는 않는다.
쵸후 모리 저택을 보면서 일본은 문화재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저택을 온전히 잘 보전해서 분위기만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도나 기모노를 입는 체험을 곁들여서 관람을 심심하지 않게 했던 점이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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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일본 겨울 역사 여행’, 임언영, 2016.01.05.,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51257956&cate=C04&mcate=M1002#
열린 변방, 조슈(長州)-메이지유신의 발상지, 허영란, 2007, p222-246
지식백과 일본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 신미나, 일본사학회
지식백과 일본 다이묘- 모리 테루모토, 신미나, 일본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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