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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를 낳은 생명의 요람, 통영 - 박경리 문학관
박경리 문학관박경리의 대표작인 ‘토지’친필 원고와 여권,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선생의 실지모습이 담긴 영상실, 선생의 집필한 책과 작품에 관한 논문 등을 모아놓은 자료실도 마련되어 있다.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여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恨)을 새로이 부각시킴으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선생 박경리를 기념하고, 박경리선생의 고향으로 선생문학에 끊임없는 영감을 제공한 고향 통영을 소개함으로써 선생의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건립한 기념관은 전시실과 영상실, 자료실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기념관이 있는 박경리공원에는 박경리선생 묘소와 육각정 등이 있어서 자연과 함께 공원을 둘러보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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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를 낳은 생명의 요람, 통영
박경리 기념관의 모습. 평생 투명하고 순수한 뜻을 작품 속에 녹여 낸 작가의 모습과 비슷한 기념관 외부. 통영의 햇살과 바람이 그대로 스며들고 있다.
"김약국의 딸들" 통영의 삶을 그려내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갓, 소반, 경대, 문갑, 두석장, 나전 칠기 등)이 발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2)
고향을 생각할 때 이토록 섬세한 묘사가 머릿속에 펼쳐졌던 박경리는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한국 전쟁 후 어머니와 어린 딸을 데리고 가난한 시절을 보낸 박경리는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오게 된다. 초기 작품에는 전쟁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자전적인 요소가 강했지만 “김약국의 딸들”이라는 장편 작품으로 본래의 모습에서 탈피를 꾀한다. 박경리의 인생에서 전환기를 가져다준 이 작품의 배경은 바로 통영이다. 통영이라는 공간에서 ‘김약국’과 그의 아내 ‘한실댁’, 그리고 다섯 딸의 삶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통영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도 통영이 저절로 그려질 정도로 통영의 묘사가 자세하고 사실적이다. 동문 밖, 도리골, 세병관 등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의 통영은 지금도 통영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실제 작품 속의 배경이 된 공간에서의 색다른 감상은 더욱 폭넓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군사와 무역의 요지, 예술인들의 고향이 되다
“어업 외에 규모가 작지만 특수한 수공업도 이곳의 오랜 전통의 하나다. 근래에 와서는 두메산골로 들어가도 좀처럼 갓 쓴 사람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조왕실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최상품의 갓이라면 으레 통영갓이었고, 그 유명한 통영갓은 제주도의 말총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 이밖에도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전 기물이 이름 높다. 원료를 바다에서 채집하는 관계상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진주빛보다 미려하고 표질이 조밀한 소라 껍데기, 혹은 전복 껍데기를 갖가지 의장으로 목재에 박아서 나든 장롱, 교자상, 경대, 문갑, 자에 이르기까지 화려 찬란한 가구 제작은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3)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의 자연이 가진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통영에 사는 서민의 삶 또한 특색 있게 묘사한 부분이다. 조선왕조 300년 동안 통영은 경상도에 속해 있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특별구역이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독자적인 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통영은 자연히 그 만의 문화를 만들어 착실히 길러왔다.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특성덕분에 육로보다는 해로를 통해서 다양한 지역과의 무역이 활발했다. 더군다나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군사도시의 특성으로 학문에 힘쓰는 양반보다는 기술을 연마하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그래서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다.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 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되었다.4) 유치진과 윤이상, 박경리와 김춘수, 전혁림까지 통영이 갖는 지리적 특성으로 자연히 통영은 많은 예술인들의 고향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다.
박경리가 무성한 신록처럼 푸르고 건강하게, 또는 푹 끓인 찌개처럼 구수하게 그려낸 통영이 선생의 눈동자에 담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전쟁이 일어나기 전, 양 갈래 여고생이 매일 보고 들었던 통영의 맑은 찬란함이 그 시작이었을까. 그 속에서 가졌던 순한 마음이 선생의 작품 전체에 조금씩 흩뿌려져 있다. 이 순수한 마음은 선생의 작품 속을 돌고 돌아 선생의 뿌리, 선생을 낳은 통영으로 돌아와 기념관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고운 뜻을 전파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박경리 선생의 기나긴 작품에 감명을 받고, 이곳에까지 와서 선생의 흔적을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생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이곳, 통영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박경리 기념관 내부 1
박경리 기념관 내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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